11월호 생생 연구현장

인문학이 전하는
희망의 근거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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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인류사에 더없는 풍요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투쟁 대신 자아실현 같은 고차원의 욕구 충족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물질의 진보는 이상하게도 냉소와 분노, 불안과 좌절 같은 사회적 병리현상을 더욱 만연하게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개인과 인류 공동체 모두의 행복은 그저 꿈일까요?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가 연구하는 유토피아의 세계는 너무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서 좀처럼 귀를 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문명사회 역시 인간의 오랜 꿈과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꿈과 상상의 힘

레오 리오니의 그림동화 ‘프레드릭’은 천 년 넘게 생산성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문예술의 가치와 역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쥐 프레드릭은 하루 종일 열매와 곡식을 모으는 친구들과 달리 늘 엉뚱한 생각만 합니다. “넌 왜 일을 안 해? 꿈꾸고 있어?” “나도 일해.” 프레드릭이 한다는 일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모아둔 양식이 떨어진 들쥐들이 프레드릭에게 묻습니다. ‘네가 모은 것들은 어떻게 됐니?’ 어둔 굴속에서 배고픔에 지친 친구들에게 프레드릭은 자기가 모은 노란 햇볕, 넘실거리는 밀밭, 초록빛 딸기덤불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프레드릭의 이야기에 눈을 감고 행복해하던 들쥐들은 깨닫습니다. 때로는 꿈과 상상이 당장의 양식보다 삶을 지탱하는 더 큰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희망이나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희망고문, 흙수저, N포세대 같은 단어들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 변화의 의지,
서로를 향한 격려를 근본에서부터 무장 해제시키고 있지요.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암울하고 냉소적인 어휘들 속에
청년세대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박정원 비교문화연구소 소장

박 소장은 이런 문제의식이 비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와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의 구성원들은 10여 년 전부터 한국 사회 전반에 드리우고 있는 비관적 정서에 주목했습니다. 신문과 방송의 각종 사건사고가 암시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스트레스, 임계점에 이른 분노지수, 극단적인 인간 소외와 분풀이하듯 약자들에게 쏟아지는 혐오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인지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것입니다. 그리고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어떻게 인문학이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미래지향적 인문학

1993년 설립된 비교문화연구소는 한국어,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등의 언어 문화권과 정치·철학·미디어 같은 다양한 인문사회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연구 집단입니다. 학문적 경계와 국경의 틀을 넘어서는 특유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 세계문화 전반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형태의 통합 인문학 모델을 꾸준히 발굴해왔습니다. 이들에게 지난 2018년의 한국연구재단 대학중점연구소 선정은 그간 함께 모색해온 꿈을 현실세계와 나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전기가 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문사회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진이 진행 중인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과제의 이름은 ‘대안공동체 인문학: 공유와 연결,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연구’입니다. 이 가운데 유토피아(utopia)란 단어가 부쩍 눈에 띕니다. 토마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1516)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뜻합니다. 억눌린 중세사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상적인 미래상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은 이후 쏟아지는 ‘태양의 나라’, ‘뉴아틀란티스’, 쥘 베른의 공상과학소설 같은 미래 서사의 기원을 이루는데요. 놀랍게도 그들이 묘사한 이상사회와 과학문명의 모습 중 많은 부분이 현대인들에게 이제 더 새삼스러울 것 없는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대안을 찾아서

이들의 연구는 2000년대 들어 양극화와 불평등, 다양한 집단 갈등 등으로 발현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접근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젠더·계급·세대·생태·기술의 5가지 세부주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서로 자리 잡은 불안과 절망, 분노와 혐오, 차별과 배제 등의 원인을 진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기존 사회운영원리의 근본적 재구성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는 4차산업혁명과 AI 등의 신기술, 코로나가 촉발한 뉴노멀 시대에 대한 분석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와 공동체’를 주제로 열린 비대면 월례 세미나 ‘청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

해체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공동체들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한 탐색도 한창입니다. 동아시아와 중남미, 북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실험이 계속되고 있는 열린 공동체 운동의 비교분석과 이론화 작업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실행이 가능한 대안모형과 관련 정책을 구체화하려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의 총체적 삶의 위기에 맞서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 있는 비교문화연구소 공동연구진은 이번 가을 연달아 개최되는 비대면 국제학술대회와 세계 대안공동체 심포지움을 통해 1단계 사업에서의 결실을 수확하게 됩니다.

한편 한국연구재단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인문사회 기초연구사업의 집단연구지원 사업 중 하나로 대학중점연구소를 선정, 우수한 학자들의 결집과 공동연구를 통한 연구역량의 특성화·전문화와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적극 후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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