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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囊中之錐) 가능케 하는
자연과학·연구재단의 역할”
한국연구재단 고도경 자연과학단장(광주과학기술원 물리·광과학과)
올해 4월 한국연구재단 자연과학단장에 선임된 고도경 단장은 조금 색다른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골무’ 수집입니다.
여행 중 눈에 띌 때마다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게 어느새 3천 점 가까이 불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기념품 정도로만 여기다가 알면 알수록
다채로운 골무의 역사와 이야기에 매료된 것입니다. 골무는 화려한 의복과 정교한 수예품들의 탄생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지(支持)하는
도구입니다. 고 단장은 세상 모든 과학기술의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가꾸는 자연과학자들의 역할도 골무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연구를 묵묵히 지원하고 격려하는 연구재단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첫날부터 회의…업무량에 놀란 5개월

고 단장은 빛의 다양한 현상을 다루는 광학 분야 연구자입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시절 초 고출력 레이저를 주로 다뤘던 그는 광주과학기술원(GIST) 물리·광과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는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한 연구에 매진해왔습니다. 한국광학회 이사, 편집위원장, 부회장과 한국물리학회 광학·양자전자학 분과 위원장 등을 지낸 이력도 그의 연구영역을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단장님의 주요 연구 분야인 펨토초 레이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엑스레이 같은 짧은 파장부터 밀리미터 단위의 긴 파장까지 여러 가지 인공 빛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빛들을 제어해 물질에 조사하면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빠르게 일어나는 자연계의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00조분의 1초(10-15) 단위의 펨토초 레이저가 대표적입니다. 카메라의 셔터 속도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듯합니다. 셔터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 선명하고 정확한 기록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빛의 시간을 펨토초 단위까지 잘게 나눠 찰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물리, 화학, 생물학적 현상들을 관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펨토초 세계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고 이를 에너지와 바이오, 의학 등 실생활과 가까운 분야로 응용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고 단장이 이끄는 GIST 연구팀은 그간 집중해온 펨토초 레이저 기반의 시간분해기술을 통해 2017년 페로브스카이트 내 자유전자의 이동근원을 찾아낸 바 있습니다. 페로브스카이트는 현재 차세대 태양전지 후보군 가운데 가장 높은 광흡수성과 유연성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광전자 소자의 성능을 결정하는 에너지 운반자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고 단장과 GIST 연구팀은 펨토초 레이저 기술로 페로브스카이트 박막에서 나타나는 자유입자 거동의 시간 규모를 밝혀내며 미세구조 제어로 태양전지 소자의 에너지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학교를 떠나 연구재단에 오신 지 5개월여가 지났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간 전문위원으로 연구재단을 오가며 대강의 일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지 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단장에 지원한 후 한 달간 나름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막상 부임하고 나니 자연과학단에서 이렇게 평가가 많았나 싶을 정도로 숨 가쁜 일정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출근 첫 날 월간회의를 시작으로 두 달간은 각종 회의와 평가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습니다. 다행히 분야별로 책임전문위원이 계셔서 큰 도움을 받고 있지만 자연과학 전반의 흐름은 파악하고 있어야 해서 예전에 공부했던 기초 지식들을 다시 소환하고 학계의 새로운 경향들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애쓰고 있습니다.

수요자·학문별 특성에 맞춰 제도 개선

한국연구재단 자연과학단은 과학기술 중에서도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분야의 연구 지원과 평가를 담당합니다. 소관 분야와 관련한 정책수립과 연구동향조사, 기획연구, 지원과제 통계 및 성과 관리, 전문위원 업무 지원 등과 함께 기초연구본부 산하 학문단들의 총괄업무 수행도 함께 맡고 있습니다. 고 단장은 앞서 2014년부터 한국연구재단 사업관리위원과 전문평가단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자연과학단장에 지원하시며 특별히 뜻하신 바가 있으셨다면?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는 현장 연구자로서 불편했던 점, 또 연구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자연과학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더 북돋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단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제가 생각했던 부분들 중 상당수는 이미 연구재단에서 더 많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재단의 제도 개선 노력은 어떤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는지요?
연구재단이 계속해온 제도 개선 노력은 크게 ‘수요자 중심’과 ‘학문별 특성’이란 두 가지 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수학, 물리학, 화학, 지구과학 등 학문별 여건, 그리고 수요자인 연구자들의 환경을 고려해 보다 세밀하게 맞춤형 지원체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은 개인의 두뇌가 주요 연구수단입니다. 반면 물리나 화학은 시설과 장치, 시료 등의 수준이 성과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학문별 특성을 고려해 개인연구, 집단연구, 기반연구 등을 설계하고 각 연구자의 생애주기별 연구지원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연구자들이 제도 개선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일까요?
현재 수학 분야에서 시범사업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대한수학회와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등을 통해 일선 수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기반으로 시범사업의 틀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큰 방향은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연구체계와 발전방향을 수립하고 연구재단이 이를 지원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자연과학단장 부임 후 약 두 달간 가장 많은 노력을 들인 것도 이 부분입니다. 아마 올 가을 무렵에는 계획 수립을 마치고 내년에 시범사업을 본격화할 수 있으리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현장 연구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많은 분들이 이런 방향성에 대해 공감하시고 기대가 큰 편입니다. 가장 크게 호응하시는 부분은 역시 수학계의 상황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잘 아는 수요자들이 스스로 필요에 맞게 연구 지원 체계를 구성해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학 분야 시범사업을 통해 효과가 확인되면 보완 작업을 거쳐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 좀 더 스펙트럼이 넓은 학문 분야로 확대해갈 예정입니다.
학문별로 환경과 여건이 다른 만큼 세부적인 고민이 필요할 듯합니다.
수학을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한 것 역시 다른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편차가 크지 않고 연구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물리와 화학은 이론부터 실험까지 좀 더 다양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하늘과 바다, 땅으로 연구대상이 나뉘는 지구과학 역시 고려해야 할 차이점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연구재단이추진 중인 수요자 중심, 학문별 특성화란 큰 설계에 맞춰 보다 디테일한 시행계획을 만드는 게 제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은 1년 6개월 정도의 임기 동안 열심히 씨를 뿌리고 묘목이 크는 단계 까지는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율성·창의성은 연구재단에도 필요

최근 일본과의 무역분쟁을 계기로 기초과학 전반의 발전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비상한 시기 자연과학단장을 맡고 계신 만큼 느낌이 남다르실 듯 한데요?
일본이 주장하는 화이트리스트 소재들 대부분이 기초과학 발전 없이는 만들기 어려운 것들인 만큼 적잖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문제되는 소재와 부품들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지식이 톱니처럼 잘 맞물려야 빠른 국산화가 가능할 텐데 사실 그 연결고리가 매끄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기초과학과 지식재산을 사업화 하는 데서 모두 명성이 높은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초과학은 돈을 투자해 지식을 창출하고, 응용과학은 그 지식을 투자해 돈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재단이 국책연구과 기초연구를 큰 테이블 위에서 함께 기획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기초와 응용이 보다 잘 연계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식을 만드는 기초과학은 오늘 연구한다고 내일 바로 결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닌 만큼 보다 차분하고 신중한 준비로 미래에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학은 서구 선진국과 일본에 비해 역사가 무척 짧습니다. 현재 한국 자연과학계의 국제적인 경쟁력과 향후 전망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미국이나 일본보다 역사가 짧지만 무시하기 힘든 저력을 보여주는 한국 야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저변이나 수준은 떨어지지만 류현진, 추신수 같은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 자연과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도 연구자들이 꽤 많이 계십니다. 현재와 같은 추세로 관심과 투자가 이어지고 자연과학의 저변이 확대된다면 곧 선두그룹에 올라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국가들 역시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특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우수 이공계 인재들의 육성과 지원이라고 생각합니다.
GIST 대학장으로 이공계 인재양성에도 관심이 크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단장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나라의 이공계 인재양성 방안은?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주입식 교육의 문제에 대해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문제는 잘 풀지만 그보다 크고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는 창의적인 해결이 어렵다고 할까요.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강한데 ‘왜’라는 질문에는 약한 게 현재의 이공계 교육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좁고 경직된 사고는 강의실에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교실을 벗어나 다양하게 경험하고 사고하고 토론하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GIST 대학장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가르치면서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도 ‘왜’와 ‘어떻게’를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교수법이었습니다. GIST 학부생들이 여러 가지 딴 짓, 딴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과목들을 많이 만든 것도 그 때문입니다. 2학년까지는 집을 떠나 기숙사란 신선한 환경과 친구들 속에서 그 동안 수험지식으로 가득했을 머리를 비우고 새로운 교양지식들로 채울 수 있게 했습니다. 대학 입학이 끝이 아니라 진짜 시작이라는 점을 알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학생과 학부모들도 그런 차별성에 호의적이셔서 신입생 전원 기숙사 제도나 관련 커리큘럼이 다른 대학으로 꽤 많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 GIST 학생들과 함께

2017년 GIST에 발전기금을 쾌척하신 뉴스가 꽤 많이 검색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다른 기부자들에 비하면 정말 소액이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냥 제 시도가 대학 기부문화를 활성화하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습니다. 교수로 있을 때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좋은 성과를 많이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보직을 맡고 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대학이 정부 예산에만 기대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대학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혁신하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넉넉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교수님도 모시고 창의적인 연구에도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MIT, 하버드, 칼텍처럼 조 단위는 못 되더라도 꾸준히 기부가 이어지는 분위기가 생겨나면 대학이 국가 공동체 모두를 위한 지식 발전소가 되는 데 큰 힘이 될 거라 믿습니다.
연구재단의 역량 강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연구재단이 약 6조 원에 달하는 R&D 예산을 관리하다보니 뭔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리라 보시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예산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감독해야 하는 만큼 업무량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 그 많은 예산 가운데 재단이 자체적인 역량 강화에 쓸 수 있는 재원이 거의 없다는 게 가장 아쉽습니다. 재단의 역량 강화란 결국 자율성과 권한의 확대일 텐데,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점점 더 운신의 폭은 좁아지고 책임감 있는 지원 기관으로서의 미래도 불투명해지리라 여겨집니다. 제가 속한 자연과학자들이 첨단 과학기술을 주머니 속 송곳처럼 세상으로 밀어 올리는 골무 역할이라면, 연구재단은 그 자연과학자들을 그보다 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지원과 격려가 뒤따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고도경 단장이 취미로 모으고 있는 전 세계 골무들의 일부

고도경 자연과학단장은?


고등학생 시절 과학신서를 보며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198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국제학생회 활동을 하며 생긴 해외 문화에 대한 관심이 현재의 여행 취미로
이어졌다. 1992년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를 거쳐 2003년부터
광주과학기술원 물리·광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등광기술연구소 광공학연구부장,
GIST 광과학기술학제학부장,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레버흄 초빙교수,
GIST 물리전공 책임교수, 대학장을 역임 하였다. 여가 시간 틈틈이 기타 연주와 함께
골무 수집품들에 대한 책과 전시공간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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