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도 배움에 대한 열정은 더욱 타오릅니다. 지난 7월 20일, 한국연구재단 NBS 스튜디오에서는 2021년 두 번째 ‘NRF 즐거운 이동과학교실’이 개최되었는데요. 이번에는 특별히 과학이 아닌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흥미진진한 멘토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이동과학교실에는 글로벌박사양성사업을 수행중인 박정슬 연구자 멘토와 대전 갑천중 2학년 김정연, 정다인 학생 멘티가 참여하여 교과서 너머에 있는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과서 속 통신사, 그 이야기를 넘어서
먼저 역사란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 과거 사실의 기록을 일컫습니다. 역사학자는 문자기록, 유물, 유적과 같은 사료를 연결하고 빈틈을 메워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갑니다. 하지만 인류가 기록하는 역사에는 빈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학자가 지난 흔적을 톺으며 추론을 통해 결과를 도출하기에, 해석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박정슬 멘토 연구자는 현재 역사는 그 역사에 대한 의문 자체가 역사의 시초가 될 수 있다며 조선의 ‘통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조선 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에도 박부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단 통신사는 일본과의 외교와 우호관계 회복을 위한 명분으로 마련된 사절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 속 통신사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7년간에 걸친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국 농토 2/3가 황무지로 변하여…
일본에서는 정권이 바뀌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웠다.
이후 조선은 일본의 요청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외교 사절단인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
통신사는 일본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천재교육 역사교과서 p.171 中
하지만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7년이나 지속한 일본과 조선은 왜 갑자기 외교를 선택했을까요? 일본의 새로운 정권이 국교 회복을 요청했다고 조선이 그에 응당해야 할 명분이 있었을까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전쟁 책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제거되었다고 하여, 44년 만에 신뢰의 관계로 돌이키기에는 두 국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적대적으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기존 전쟁을 일으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와 지지 세력을 반대하는 국민이 무수히 많았고,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던 기존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이 쌓여있어 오히려 이를 제지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 정치적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조선과의 외교였던 것이죠.
따라서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택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 국교 회복을 희망하는 것과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국교 회복 요청이 막부의 권위를 빌린 쓰시마의 독단적 선택이라고 여겨, 다시 쓰시마에 두 가지 요청을 전합니다. 먼저 국교 회복을 요청하는 막부 명의의 공식 문서를 보낼 것과, 전쟁 당시 왕릉을 범한 죄인을 직접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에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문서화하여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1606년 4월 5일, <선조실록>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일본의 태도가 바뀌어 모든 행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반대라고 하니
그들을 대접하는 우리의 방법 또한 융통할 만합니다.
이번 기회를 잃으면 앞으로 편승할 만한 기회가 없을 듯싶습니다.
… 혹시라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정권을 다시 엎어 사태가 변한다면
어찌 모욕을 당하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도요토미 히데요리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년에 얻은 아들로, 아즈치·모요야마 시대와 에도 전기 시대에 활동하던 다이묘.
**다이묘 : 일본에서 헤이안 시대에 등장하여 19세기 말까지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고 권력을 행사했던 유력자.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번 통신사 파견이 국교 회복의 기회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정세가 불안정하고 막부의 의중이 불투명하다는 측면을 바라보며 통신사 파견을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