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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한국 사회,
생명과학계도 큰 책임감”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본부 생명과학단 노태영 단장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코로나 사태가 서서히 엔데믹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대한 인류의 노력에 낮은 병원성의 오미크론 변이라는 자연의 선물이 더해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3년간 이어진 사상초유의 팬데믹은 우리 삶 전반에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한층 진일보한 위생관념과 감염병 대응전략처럼 긍정적인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노태영 신임 생명과학단장은 이제 전 국민이 RNA라는 단어에 익숙할 만큼 높아진 기초연구에 대한 관심도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인간게놈지도와 후성유전학

지난 2월 기초연구본부 생명과학단장에 부임한 노태영 신임단장은 인간게놈지도 완성에 힘입어 개발된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Next Generation Sequencing, NGS)의 활용기술 개발 초기 연구진 중 한 사람입니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 박사후연구원 시절 처음 접한 이 신기술을 계기로 후성유전학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단장님의 주요 연구주제인 후성유전학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1953년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 발표 이후 반세기만에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기술이 탄생하며 인간의 DNA 염기서열 전체를 한꺼번에 해독하는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DNA 염기서열의 유전 정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DNA와 함께 염색체를 구성하는 히스톤(histone) 단백질의 기능을 분석해야 합니다. 히스톤 단백질은 기존에 단순히 염색체를 구성하는 구조물 정도로만 알았는데 1990년대부터 유전자 발현과 세포의 신호전달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이는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다른 질병을 앓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요. 후성유전학은 이처럼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환경과 생활습관, 바이러스 감염 등의 후천적인 요인에 따라 유전정보가 다르게 발현되는 양상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생명 현상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면 세포의 특성을 분류하고 정상세포와 질병세포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세계 최초 에이즈 완치를 위한 후성유전체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란 단장님 관련 기사가 눈에 띄던데요. 어떤 내용의 연구였는지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일으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여러 가지 강력한 치료법에도 불구하고 체내에서 잠복감염 상태로 숨어 치료제가 면역세포 공격을 회피하며 에이즈 완치를 가로막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HIV가 어떻게 환자에게서 잠복감염 상태를 유지하는지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게 에이즈 완치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간 HIV의 단백질과 숙주 세포의 반응 등에 대한 연구에 따라 HIV 만성감염에서 후성유전적 조절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지만 전체 게놈 수준에서 HIV 잠복감염 세포의 후성유전체를 분석하는 연구는 보고된 바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저희 연구진은 HIV 잠복감염 세포주의 전체 유전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시도했습니다. HIV에 감염된 세포 안에서는 여러 가지 비감염세포와 다른 양상의 단백질이 만들어지는데 이 정보를 모아 세포에서 HIV 초기 감염 후 잠복감염으로 전환될 때 특이적으로 발현되는 유전자 11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11개 유전자를 이용해 HIV 저장소(세포)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에이즈와 또 다른 만성감염질환들의 완전치료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계신 국가바이오빅데이터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기술의 개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바이오 빅데이터 확보 경쟁이 치열합니다. 전문가들은 현재 추세라면 2025년경 유튜브나 천문학 분야도 미미해보일 만큼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바이오 빅데이터가 생산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이오 빅데이터는 특히 유전질환과 고령화 사회에서 발병률이 높은 퇴행성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2020년부터 올해까지 범정부 차원의 국가바이오빅데이터 시범사업을 통해 매년 5천 명씩 총 2만 명 이상의 유전체 데이터를 구축해가고 있습니다. 향후 목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난치성질환자, 암환자와 일반인까지 모두 100만 명의 건강정보와 유전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받아 바이오 빅데이터 댐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유전체 연구는 한 사람의 유전자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비교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유전적 질병을 가진 사람과 건강한 사람들의 유전자를 보다 많이 분석하고 비교할수록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더 정교하게 특정할 수 있게 되고 치료법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밤새며 준비한 첫 연구계획서

한국연구재단 생명과학단장에 지원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신진 연구자 시절부터 중견 대접을 받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많은 연구자들을 상대하며 연구비를 관리하는 조직은 과연 어떻게 돌아갈까 궁금한 마음도 생겼습니다. 거기에 정년 이후에도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 텐데 과연 실험실에만 머무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고민이 더해지며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당시 생명과학단장 선임 공고를 보게 되었는데 제 개인의 지평 확대뿐만 아니라 학계와 사회 모두에 봉사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리란 확신이 들어 지원서를 내게 됐습니다.

그간 한국연구재단과 함께 수행하신 과제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연구가 있다면?

아무래도 2008년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한 소액 연구가 가장 기억이 많이 납니다. 박사후연구원 때까지 혼자서 과제기획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오자마자 정신없이 과제계획서를 작성하느라 아주 혼이 났습니다. 특히 여러 종류의 행정서식이나 연구비 작성요령에 문외한이어서 주변 교수님과 학과 사무실을 쫓아다니며 요령을 익혀야 했습니다. 한 달 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간신히 접수마감일을 맞췄던 까닭에 선정됐다는 소식에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만큼 기뻐했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실험실도 갖추고 학생 장학금 지원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크고 작은 과제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지금처럼 독립적인 연구자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가장 큰 밑거름들이었습니다.

단장직을 맡은 지 두 달 가까이 되셨습니다. 학교에 계실 때와 가장 많은 차이를 느끼시게 되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일단은 규모 자체가 비교 불가입니다. 한국유전체학회,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생화학분자생물학회 등의 여러 학회에서도 활동을 했는데 대학이나 학회 단위가 아니라 전국 단위로 연구자들과 함께하다 보니 정말 다양한 생명과학 연구 분야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제 제안서 평가와 성과를 관리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연구비를 받아 연구만 수행했던 상황이라면 알지 못했을 연구와 관리 현장 전반의 애로사항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장수시대, 건강한 연구지원

국내 생명과학 기초연구 분야의 최근 주요 이슈는 무엇인가요?

학문적으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빨라지고 있는 만큼 건강한 장수 사회의 기반을 만드는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수는 단순히 긴 수명이 아니라 삶의 질을 의미합니다. 기대수명이 늘어도 노환과 환경변화에 따른 질병, 더욱 다양해지는 감염질환,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와 세대 갈등 속에서 건강한 장수 시대는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새로운 도전 앞에서 건강한 장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들의 책임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년층에 집중되는 질병을 효과적으로 진단·치료하고 나아가 예방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한 기초연구가 최우선 과제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생명 현상과 학문 분야 전반을 존중할 수 있는 연구전략과 지원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현재 연구재단이 추진 중인 수요자 중심 학문별 지원체계의 안착이 생명과학 전반의 새로운 연구문화 조성에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생명과학단을 비롯해 기초연구본부 전체로 확대된 수요자 중심 학문별 지원체계의 고도화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기초연구역량이 확보될 것으로 예상되며 창의·도전·변혁적 연구문화조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학문 융합과 성과 활용이 빛의 속도로 빨라지고 있는 만큼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맞는 생명 과학 분야의 우수인력 양성과 연구 경쟁력 제고를 위한 지원체계 고도화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신임 생명과학단장으로서 특별히 중점을 두고 계신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생명과학 연구의 저변 확대, 그리고 연구자의 질적 성장을 고려한 지원 시스템 구축이 제 큰 관심사입니다. 여기에는 수도권 대학과 지방 대학의 공존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도 포함이 됩니다. 국내 생명과학계 전반의 동반 발전을 위해 세종시에서 추진되고 있는 공동캠퍼스처럼 연구장비와 시설, 인력의 연계와 네트워크를 강화할 수 있는 융합형 연구 지원 방안을 모색해보고 싶습니다. 더불어 수요자 중심 학문별 지원체계가 연구자들의 생애주기별 변화까지 세심히 고려하여 궁극적으로 질적 성장 중심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끝으로 생명과학 연구자들과 연구재단 구성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연구자는 연구재단 한 곳을 상대하지만 연구재단은 수많은 개인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입장 차이를 이곳에서 많이 느끼게 됩니다. 연구재단은 공정한 평가와 관리 시스템을 위해 부단히 힘쓰고 있지만 수천, 수만 명 연구자들의 필요를 모두 깔끔하고 완벽하게 충족시키기 어렵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고객인 연구자 입장에서는 99가지 노력보다 1가지 부족한 점이 먼저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만족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표현을 아끼지만 불만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게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99명이 만족해도 1명의 불만이 더 크게 부각되기 마련이지요. 저는 연구자와 연구재단 간의 이런 괴리가 홍보 방식의 변화를 통해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연구자들이 느끼는 개선점과 불만요소들에도 늘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반대로 바람직한 해결 사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연구 현장 전반의 공감과 이해도를 높이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About the Interviewee
노태영 생명과학단장

한양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화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 분자촉매연구센터와 미국 NIH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줄기세포를 시험관에서 키워 인체 장기구조와 같은 조직을 구현하는 오가노이드를 모델로 유전체 빅데이터 생산과 분석 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세포의 생로병사 메커니즘 규명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2020년 12월 관련 공동 융합 연구 결과를 <네이처> 지에 게재했다.

Asset of life

<울퉁하고 불퉁한 우주 이야기>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지리 이야기>

학부는 공학, 석·박사는 생화학, 포닥은 유전체로 이어지는 그의 남다른 호기심은 연구원 시절 우연한 기회에 아르바이트로 번역을 맡은 청소년 교양서적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주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관심이 남달라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만, 세계지리는 전혀 생소했던 분야였음에도 관련서적을 찾아 읽으며 흥미롭게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노 단장은 향후 자신의 주 전공인 생명현상에 대해서도 대중적인 교양서를 집필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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