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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비판과 성찰,
어려울수록 더 빛날 것”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 인문학단 윤영순 단장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수백만을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시킨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후 이 같은 제목의 책으로 전 세계를 충격과 논쟁으로 몰아넣습니다. 자신과 세상의 기계적이고 일상적인 행위를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선량하고 친절한 그 누구라도 당연하다는 듯 끔찍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터나 과학적 논증으로 좀처럼 재단하기 힘든 인간의 모순은 인문학의 영원한 연구주제입니다. 윤영순 신임 인문학단장은 대중이 이런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용기 있게 대면할 수 있도록 북돋는 비판과 성찰,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통한 화해와 치유의 모색이 인문학의 존재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존재론적 모순과 치유

지난 2월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장에 부임한 윤영순 단장은 러시아 문학 전문가입니다. 자연스럽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인터뷰의 에피타이저로 올랐지만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와 주변국에도 지인이 많은 그에게는 질문자가 생각하듯 단순히 딴 나라 이야기 정도로 가볍게 다룰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안타까움과 복잡한 감정은 이번 사태를 앞서 예견이라도 하듯, 수년 전 한 신문에 연재했던 신문 칼럼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푸틴의 마초주의와 러시아 국민의 절대적 지지, 우크라이나·폴란드·벨라루스 등의 주변국들과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애증 관계에 대한 고찰이 전쟁과 폭력이란 인류의 아이러니에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단장님의 주요 연구주제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제 전공은 20세기 이후 현대 러시아 문학입니다.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러시아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처럼 사회변혁, 인간성의 상실과 회복에 천착한 작가들로 유명합니다. 그중 제가 주로 다룬 인물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 시대의 작가 플라토노프입니다. 플라토노프는 1920~30년대 스탈린 시대의 작가인데요. 공산주의 이념과 사회현실의 괴리를 독특한 문체와 형식으로 풍자한 인물입니다. 덕분에 아들을 시베리아 유배형으로 잃을 만큼 스탈린에게 밉보였고 생전에 주요 작품들이 제대로 출판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해금된 뒤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체벤구르>를 번역하고 연구하면서 이 작가가 2차 대전에 참전했을 당시 집필한 전쟁 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근래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어머니와 벨라루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고 있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그에게 2015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도 논문을 썼던 만큼,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마음이 더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명분이야 어쨌든 결국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니까요. 왜 이런 어리석은 역사의 오류가 반복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인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많아지는 때입니다.

연구사업을 통해 한국연구재단과 여러모로 인연이 많으셨을 텐데요.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소개 해주세요.

사실 오히려 크게 인연이 없었습니다(웃음). 그간 연구재단 지원사업에 도전하며 로또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해 자신이 있었던 사업은 떨어지고, 거꾸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과제가 선정되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연구재단에 와서 평가와 선정에 관여하다 보니 이제야 당락의 원인과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이해됩니다. 떨어질 만했고, 또 붙을 만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연구자들이 자체적으로 해온 연구의 결과물을 재단의 지원 덕분에 책으로 엮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액수였지만 해외 학자들과 소통하고 또 양국 재단의 지원으로 책까지 펴낼 수 있었던 게 아주 기뻤습니다. 또 이제는 인문사회연구소사업으로 통합된 토대연구지원사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사전을 편찬하며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웠던 러시아-프랑스 문화, 러시아-유라시아 문화 분야의 방대한 자료와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성공한 것,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협업해 청년층 자살 등의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문학적 치유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던 공동연구도 제게 큰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인문학의 봄은 언제쯤

한국연구재단에 쌀쌀한 초봄에 오셨는데 어느새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인문학 단장에 부임하셨을 때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부임하자마자 저술출판지원사업, 신진연구자지원사업, 학술연구교수지원사업 등의 평가가 이어져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뒤 이제 비로소 한숨 돌릴 시간을 맞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쁨이나 설렘보다 녹록지 않은 인문학 연구환경의 현실을 보다 정확히 알게 돼 오히려 더 심경이 복잡해졌습니다. 학령인구의 감소 등의 이유로 인문학이 대학 구조조정 1순위가 되면서 결과적으로 몇몇 소수 전공은 이제 연구뿐만 아니라 학문 자체의 단절까지 우려되는 상황에 몰리고 있기도 합니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깊이 있게 연구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기회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고, 학문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조차 힘든 환경으로, 비전임 연구자들은 생계를 걱정하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저는 다양한 전공과 세대의 인문학 연구자들을 만났고, 교수, 석·박사 과정의 학문 후속세대, 시간강사 등 그들에게 어떤 지원과 도움이 필요한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재단의 인문학 지원 분야에서 예산의 증감과 별개로 긍정적인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연구자의 수월성 제고와 더불어 비교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비전임 연구자들에 대한 안정적 연구환경 조성을 확대하는 방향입니다. 이는 그간 제가 바라던 인문학 연구의 미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에 그 변화의 과정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연구현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연구재단의 모습도 궁금한 부분입니다. 긍정적인 면과 개선점들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연구재단은 러시아와도 비슷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동서양이란 이질적 세계의 접점이면서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좋게 말하면 정부와 연구자의 가교이면서 종종 샌드위치 같은 처지가 되기도 하지요(웃음). 제가 놀란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선진국 부럽지 않은 세계적인 수준의 학문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재단에 오기 전에는 연구과제의 선정을 좌우하는 빅 브라더와 같은 존재가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는데요, 실제로는 아주 체계적이고 공정한 시스템이 있더군요. 다만 과정과 체계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불합리한 사항들의 개선이 쉽지 않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또 다른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예산 규모의 정체와는 별개로 연구재단의 인문학 연구지원 사업 구조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동연구 사업은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은 학술연구교수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수렴되는 등,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의 요구에 맞는 바람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만 누차 말씀드리지만 부정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지원 예산이 타 학문분야와 비교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소규모인 데다 수년간 제자리걸음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제한된 예산 내에서 연구비 지원이 시급한 대상을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개선하다 보니 인문학 분야의 중요한 사업들, 예를 들어 저술출판지원 사업이나 일반공동연구지원사업 등은 선정율이 너무 낮아지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연구재단만의 일이 아니라 여러 관련 부처와 부서의 이해와 조율이 필요한 부분임을 잘 압니다. 그 외에도 이공계 분야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인문학의 학문적 특성을 고려해 일률적인 과제 평가 및 성과 시스템을 개선하는 노력은 계속 추진되어야 할 숙제라고 여겨집니다.

엄혹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인문학단장에 부임하시며 특별히 중점을 두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인문학 연구자들이 더욱 도전적으로 과제에 지원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이를테면 지원사업 선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인문학 연구자들의 미래 불안정성을 조금이라도 낮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 사업이 사라지고 또 새로 생겨나면서 전체적으로 사업이 단순화되고 연구자와 평가자의 수월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기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매년 초 공지가 나오기 전까지 지원사업의 범위를 예측하기 어렵고, 준비해오던 사업이 예기치 않게 사라지기도 합니다. 저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더욱 안정적으로 자신의 생애와 학문 연구 주기에 맞추어 질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문학 지원사업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기존의 개인 및 공동연구 사업의 안정적 수행과 더불어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과 팬데믹 이후의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진단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문학 사업을 기획, 제안하는 것도 관심사입니다. 예를 들어 인문한국(HK)의 경우 신규 선정은 중단되었지만, 여러 연구소에서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후속 사업과 성과확산 노력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업 이후 인문학 연구 관련 대형 프로젝트는 아마도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일 것입니다. 현재 해당 사업은 기존의 다양한 대형 사업들, 즉 토대연구 지원이나 HK 사업 등을 대신하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 인문학 발전의 거대 담론을 이끌거나 현재 우리 사회의 변화와 위기 상황에 대한 인문학의 대응을 담아내기에는 다소 지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문학은 가장 개별적이고도 다양한 연구를 담아내어야 하는 학문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환경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사회 각 분야의 다양한 관심사를 관통하는 거대 담론, 타학문 분야와의 융합과 통섭을 통한 새로운 아젠다의 제시 등, 인문학 본연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도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우리나라의 위상에 상응하는 인문학의 역할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문학은 수용하던 입장을 넘어서 하나의 전범이 되고, 변화하는 세계의 다양한 문제에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건이 허락한다면 향후 우리 사회의 발전적 미래에 일조할 수 있는 전망적 인문학 지원사업의 가능성도 타진해보고 싶습니다.

끝으로 재단 구성원과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당부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연구재단이 단순한 정책집행 기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지원 방향의 수립과 공정한 정책수행으로 전체 학문의 발전을 견인하고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미래를 기획하는 기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국내외 모두에서 변화가 몰아치는 상황이야말로 연구재단이 본연의 역할과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재단 구성원들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는 일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돼있는 연구사업을 지원하고 관리하니까요. 그러니 수동적인 사고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업무에 임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인문학 연구자들께는 현장에 있다가 연구재단에 온 만큼 어려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인문대학의 학과들이 대학 구조조정의 우선순위 대상이 되고, 학문 후속세대들은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현실 말입니다. 그렇지만 자리를 지켜달라고, 연구에 힘써달라고, 버텨달라고 감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풍요보다 엄혹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더 찬란하게 빛났던 러시아 문학처럼, 저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다면적인 위기의 상황이 인문학의 필요성을 오히려 증명하고, 성찰과 비판, 소통과 치유라는 인문 정신 본연의 정수를 더 잘 보여주는 시간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임기이지만 연구재단과 함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학문 분야 어디에나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About the Interviewee
윤영순 인문학단장

경북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사범대학에서 플라토노프 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경북대 노어 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토리노 그로스만 연구소 객원 연구원, 게르첸 러시아 국립사범대학 교환교수를 지냈다.

Asset of life

러시아 문화읽기

윤영순 교수가 어려운 전공 분야를 많은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개발한 교양 교과목이다. 학생들로부터 스스로 비판적인 탐구를 지향하며 자연스럽게 자신과 사회를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호평을 받았으며 2020년 제2회 경북대 교육상을 수상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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