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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연구 지원 10년,
이제 성과의 시대로 간다
한국연구재단 이지현 문화융·복합단장 / 한국과학기술원 문화기술대학원
최근 이집트에서 스티브 잡스와 닮은꼴 인물이 등장해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얼마나 비슷했는지 2011년 사망한 그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번 해프닝은 사후에도 여전한 스티브 잡스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로에는 마법이 존재한다”던 그의 믿음은 21세기 혁신의 아이콘이 된 애플과 픽사를 탄생시켰습니다.
더불어 근대 이후 평행선을 달려온 과학과 인문, 기술과 예술의 교감이 인류의 생활양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만난 이지현 문화융·복합단장 역시 ‘융복합’의 거대한 잠재력에 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융합연구도 이제 형식의 단계를 넘어 더욱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성과의 영역으로 나아갈 때라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더 높은 단계를 향한 교두보 마련의 해

한국연구재단의 ‘학제간융합연구지원사업’은 2007년 확정된 국가융합기술발전 기본방침에 따라 2009년 시범사업으로 첫 발을 뗐습니다.
과학기술 주도형 R&D에서 부족한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ELSI)을 고려하는 것과 통찰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과의 융합연구로 극복하자는 취지입니다. 소통과 이해가 드물었던 영역 간의 협업인 만큼 당연히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차곡차곡 크고 작은 성과들을 다지며 어느새 10년째를 맞게 된 올해, 우리나라의 융합연구는 이제 또 다른 진화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올해 융합연구 분야에서 많은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지원 사업은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융합연구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초점을 맞춰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교 역할을 하는 융합연구총괄센터를 거점으로 인문사회와 이공계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성과들을 발굴·공유하며 본격적인 융합연구의 기틀을 다져온 것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10년차인 올해 마침내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융합연구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사업에서 어떤 부분에 변화가 있는지 소개해주세요.
기존 융합연구 지원사업의 개편을 통해 아젠다 발굴 위주의 기획사업인 씨앗형과 중장기 지원인 새싹형을 통합하면서 일반공동연구지원사업 내에 융합연구 유형이 신설됐습니다. 이에 따라 그간 큰 변화가 없던 과제 수와 지원예산 규모가 모두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3년의 학제 간 공동연구 지원을 3+3년의 연구소 단위로 흡수해 연구자들이 융합연구와 전문인력 양성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고 있습니다.
문화융·복합단장 부임 6개월째가 되었습니다. 그사이 의미 있는 변화들이 많았던 만큼 바쁜 시간이 되셨으리라 여겨지는데요?
처음 단장에 추천되고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융복합’이란 이름에 마음이 크게 기울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제 스스로 건축과 전산의 융합 연구자란 자긍심이 있기도 했고, 아직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융합연구의 가치를 제대로 정립해보고자 하는 열의가 생겨났습니다.
전반기에는 우선 평가와 부족한 예산 확보에 주력했고 이제 대부분 정리가 됐으니 남은 임기 동안은 꼭 해보고 싶었던 목표에 집중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전히 융합연구를 ‘깍두기’처럼 인식하는 분위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손꼽을 만한 융합연구 성과가 드문 것은 이공계와 인문사회계, 인문사회계와 이공계가 여전히 서로를 벽안시하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등한 주체로서 함께 연구한다는 연대의식보다 융합이란 기치만 내걸 뿐 실은 여전히 각자의 연구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융합연구의 시작 단계부터 어느 한쪽에 기울어짐 없이 동일선상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과 이공계 학문이 함께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공계 분야가 주도하는 융합연구는 이미 상당 수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예술 분야에서 융합연구에서 접근하는 것은 여전히 열악하며 보호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전반기 내내 예산과 사업을 늘리고 지키기 위해 분주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와 같이 인문사회계가 이공계 주도의 융합연구에서 곁불을 쬐어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첫 단추를 꿸 때부터 사회현안 대응 같은 대승적인 목표를 공유하며 동등하게 협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요즘 대외적인 심포지엄이나 워크숍뿐만 아니라 연구재단 내부에서도 이공계의 학제간 융합을 담당하고 있는 ICT·융합연구단, 국책 관련 부서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열심히 공감대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중입니다.

‘적당히’ 가 아닌 ‘탁월한’ 융합연구

이지현 단장의 또 다른 목표는 우리나라의 융합연구에 ‘수월성’을 이식하는 것입니다. 그는 융합연구를 향한 후하지 않은 평가의 이면에는 상당 부분 ‘그냥 적당히 두세 분야를 섞어놓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타’로 취급받아온 융합을 독자적인 체계의 학문 분야로 발전시키는 한편, 융합 관련 분야 모두에서 ‘적당히’가 아닌 ‘탁월한’ 성과를 만들 수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융합연구의 길을 개척해온 그는 ‘융합이니까 모두 잘하지 못해도 괜찮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장님께서는 어떻게 융합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원래는 인문예술적인 요소가 강한 주거환경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해외에서 새로 오신 교수님을 통해 전산설계(Computational Design)라는 건축 분야의 새로운 조류를 접하게 됐습니다. 건축 디자인의 복잡성에 전산의 알고리즘을 적용하는 학문입니다. 특히 제가 전공한 사례기반추론 (Case-Based Reasoning)은 다양한 임상경험을 진료에 활용하는 의사나 판례 기반의 법률가처럼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디자인을 구체화하는 과정입니다. 국내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 과정을 밟으며 건축 디자인의 주관성에 대해 의구심이 많아지고 있던 참에 뭔가 딱 맞아떨어지고 설명이 가능한 학문이 있다는 것에 큰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국비 유학생 시험에 도전해 합격한 게 융합연구와 만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건축과 전산을 함께 공부하시는 게 무척 어려웠을 듯합니다.
유학을 떠난 카네기멜런 대학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심리학자, 정치학자이고 컴퓨터과학자이기도 한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교수와 흔히 카네기학파로도 불리는 동료 학자들의 영향 아래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융합 학문의 발원지였습니다. 덕분에 너무 어려워서 졸업장을 받기 힘든 학교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모르고 입학을 했는데 주변의 다른 유학생들로부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학교로 가라는 걱정 어린 이야기도 숱하게 들었습니다. 국내에서 컴퓨터라고는 당시 막 쓰기 시작하던 워드프로세서와 오토캐드(Auto CAD) 정도만 알고 갔던 제게는 처음부터 유닉스와 워크스테이션을 사용해야 하는 환경이 너무 큰 벽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융합 연구자의 길을 걷고 계시네요.
처음 2~3년간은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웃음). 무작정 전산학부에 밀어 넣고 컴퓨터과학 전공자들과 경쟁해 살아남아야 비로소 박사 학위 과정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구조를 알게 되면서 왜 많은 학생들이 중도포기에 이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탁구공 쳐내듯 어떻게든 버티고 버틴 덕분에 당시로서는 국내에서도 생소했던 융합 학문에 눈을 뜰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제가 속한 EDRC(현 ICES, Institute for Complex Engineering System) 연구소가 전산, 건축, 기계, 로보틱스와 언어학 등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칸막이 없이 함께 연구하는 곳이었던 까닭에 융합의 가치와 재미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습니다.

융합연구는 가치와 재미의 개미지옥

카네기멜런대 전산설계 분야의 한국인 박사 1호가 된 이 단장은 유학생 시절 인연을 맺었던 동료의 제안을 받고 대만의 신생 과학기술대학교인 운림과학기술대 전산설계학과의 설립 멤버로 참여합니다. 5년이 지난 후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돌아온 그는 다양한 전공 분야의 학생들과 함께 문화와 기술 전반을 아우르는 융합연구로 보폭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과 무인자율주행차 연구부터 스티브 잡스, 방탄소년단처럼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문화현상의 분석까지 종횡무진 융합연구의 외연을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명실상부 우리나라의 1세대 융합 연구자라 할 수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융합연구의 새로운 10년을 준비해야 하는 문화융·복합단장의 자리는 또 다른 도전이자 숙명일 듯합니다.

▲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주최한 CAAD futures 2019 국제 컨퍼런스 기념

융합연구를 ‘개미지옥’이라 표현하시는 게 재미있습니다.
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의 개미지옥이지요. 일견 서로 연결성이 없어 보이고 각각으로도 어려운 학문 분야에 동시에 접근해야 하는 점은 융합연구 입문자들에게 굉장히 힘든 관문입니다. 자칫 이도 저도 아닌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상존합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여러 분야에 모두 정통해야만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만큼 융합에 미래가 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통합과 분리가 반복되고 있는 학문의 역사를 볼 때도 향후 수십 년간은 융합의 시대인 게 분명합니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와 기술을 모두 붙잡고 씨름하다 좌절하곤 하는 제자들에게도 융합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늘 굳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구자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융합연구는 이질적인 분야들이 모여 함께해야 하는 쉽지 않은 연구이지만 모두의 노력이 의미 있는 결실들을 만들어내고 또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융합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해야 하는 소임을 맡고 보니 연구재단의 구성원들이 그간 얼마나 융합연구의 발전을 위해 애써왔는지를 알게 돼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도 참 고맙기도 합니다. 융합연구 지원사업이 연원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제도적 장치들이 완비가 되어 있습니다. 공정성을 담보하는 시스템이 충분히 갖춰진 만큼 이제 이를 기반으로 더욱 우수하고 독창적인 융합연구의 열매들이 맺힐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융합연구의 미래에 대해 더 많은 연구자와 국민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지현 문화융·복합단장은?


연세대학교 주거환경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사례 기반의 디자인 추론’ 연구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카네기멜런대 공학융합시스템연구소 연구원과 대만국립운림과학기술대
전산디자인대학원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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