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TOP
R&D
포커스

"인문사회 젊은 연구자 살아야 대한민국도 산다"

한국연구재단 박구용 인문사회연구본부장(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SCROLL

“1.66%라는 숫자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인문사회분야 연구계의 현황과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를 묻는 질문에 박구용 인문사회연구본부장(전남대 철학과 교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66%는 대한민국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에서 인문사회 분야에 지원하는 연구비 비율입니다. 액수로는 약 3,000억 원. 전체적인 사업 규모를 늘려 이 숫자를
높이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박 본부장은 강조했습니다.

또 하나는 인문사회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경쟁력 있는 연구자들이라면, 대한민국이 책임져야 한다”라는 것이 박구용 본부장의 ‘철학’입니다. 지난해 11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 부임한 박 본부장을 만나 인문사회 분야 연구 활성화를 위한 포부와 각오를 들어보았습니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 부임한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재단과 남다른 인연, 공동연구 선정이 교수 채용으로

  • 부임하신 지 2개월 정도 지났습니다. 많이 바쁘셨을 듯한데,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생각만큼 바쁘지는 않았습니다. 또 제가 너무 바쁘게 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물론 저한테 맡겨진 일, 해야 할 역할을 알기 때문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지난 2개월은 무엇보다 인문사회연구본부를 비롯해 재단 내부 구성원들과의 의사소통에 주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생활했던 사람끼리 소통한다는 게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어느 조직이든 윗사람은 “우리는 의사소통이 잘 된다”고 말하게 마련이고요(웃음). 이런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죠.

  • 한국연구재단과는 오래전부터 남다른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구재단과는 개인적으로 아주 큰 인연이 있어요. 저는 재단 덕분에 교수가 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박사학위를 막 마쳤을 때였는데요. 마침 당시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인문학 분야 공동연구 사업을 시작했는데 제가 주도해서 계획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학과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대학 전체적으로도 인문사회 분야에서 연구지원 사업 두 개를 연이어 받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죠. 당시 대학 총장께서 “철학과에서 그런 일도 할 줄 아느냐”며 교수 자리 두 개를 흔쾌히 내줬고, 저를 포함해 공동연구 사업을 주도했던 두 명이 교수로 채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재단 덕분에 제가 교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 다행히 좋은 인연, 좋은 기억만 있었네요.

    어떻게 세상일이 꼭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웃음) 한번은 연구지원 사업에 처음 참여하는 동료 교수와 함께 재단에 평가를 받으러 온 적이 있어요. 무사히 평가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그 교수가 그러더군요. “교수님, 이렇게 힘들게 일하셨군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때 일부 심사위원이 상당히 고압적으로 질문을 했던 것을 두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평가를 몇 번 받아본 저는 익숙했는데 처음 평가를 받아본 그 교수에게는 그 장면이 상당히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는 고압적인 심사위원들도 있었지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 부임한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전체 R&D 예산 중 인문사회 분야 연구비 1.6%”

  • 본부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요. 임기 동안 이 일만은 꼭 하고 싶다거나, 혹은 이 문제만은 꼭 해결해보고 싶다는 게 있으신가요.

    사실 재단에서 시행하는 연구지원 사업은 사회보장제도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연구자를 돕는 기관이 아니라는 거죠.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능력 있는 연구자를 발굴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어느 정도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젊은 연구자들에게 과연 희망을 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재단은 젊은 연구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 그 말씀은 인문사회 분야 젊은 연구자들의 미래가 상당히 불투명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데요.

    그렇습니다. 조금 심하게 비유하자면 최저임금을 받은 노동자들보다 더 처우가 열악한 분들도 많습니다.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심지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연구자조차 연봉 2,400만 원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적어도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연구자들은 국가가 책임져야한다는 게 저의 소신입니다. 인문사회 분야 젊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향적인 연구비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방안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자리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 일부분만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한때 이러한 문제를 집단연구로 해결해보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여러 강점이 있지만, 집단연구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연구단 전체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운영비, 관리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연구에 참여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직접 지원하는 돈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연구자들이 직접 혜택을 받는 지원이 필요한데요. 이것은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 1호인 일자리 창출과도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대학 현장에서는 인문학 강의가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과 인문학 부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방안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 오랫동안 인문학, 사회과학의 위기가 사회적 화두로 언급되었습니다. 본부장님께서 말씀하신 지원 방안을 포함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대한민국의 한해 R&D 예산에서 예술 분야까지 포함한 인문사회 분야 예산 비율이 1.66%입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3,000억 원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인문사회 분야에 지원되는 연구비 비율을 높여야 합니다. 최소한 2%대 비율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게 저의 희망입니다. 현재의 예산 규모로 보면 4,000억 원 정도의 금액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서 말씀드렸던 젊은 연구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업을 펼칠 수 있습니다. 대학 현장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문사회 분야 강의나 강좌의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과감하게 줄여야 합니다. 우리만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특히 OECD 국가의 교육과정 평가의 핵심지표입니다.

박구용 본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동원의 인문학에서 동행의 인문학으로”

  • 한 번에 해결하면 좋겠지만,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전 사회적으로 정확한 진단과 제대로 된 토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문학은 사람 몸에 비유하면 기초체력입니다. 키 크고 살도 찌고 심지어 근육이 있어도 기초체력이 부족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겠습니까? 늘 힘이 없고 무기력한 상태가 됩니다.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이 없으면 국가 경제 규모가 커지고 덩치가 커져도 기초체력이 부족한 몸과 비슷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대한민국이 목표로 하는 경제 수준, 그리고 이러한 수준에 걸맞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어떻게 육성하고 키울 것인지에 관한 사회 전체적인 논의와 대토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는 합의가 도출되면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비 규모도 더 늘리고 인력도 더 양성해야죠.

  • 인문사회 연구 활성화를 위해 연구자의 관점에서 재단에 하실 말씀이 있다면?

    연구자는 한 명이 아니고, 목소리도 다양합니다. 재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많습니다. 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연구자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런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오히려 더 많이 귀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학문과 연구 현장이 어떤지 하나만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인문사회 분야 학회가 활성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회에서 인정받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회의 자율성과 권위를 스스로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과 연구의 현장에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더 많은 소리를 들어야겠죠.

  • 이에 못지않게 연구자들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비를 늘리는 게 일차적인 과제입니다. 연구자들이 재단과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인문사회 연구가 왜, 얼마나 중요한지 국민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는 연구자들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문사회 연구의 중요성과 가치를 전체적으로 높이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본부장님께서는 평소 ‘동행의 인문학’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시민자치를 예로 들어볼까요? 자치단체장이 시민자치를 구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민자치, 시민자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여기에 사람들을 모아 참여시킵니다. 결코 나쁜 취지가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의 시민자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을 ‘동원 자치’라고 부릅니다. 거꾸로 시민자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찾습니다. 왜 잘 되는지, 뭐가 부족한지 공부를 하고 그곳을 지원해줍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하면 지원하겠다고 알려줍니다. 이것을 ‘동행 자치’라고 부릅니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인문학 대중화를 잘 하는 사람, 잘 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곳을 찾아가 그냥 지원해주는 겁니다. 이것이 ‘동행의 인문학’입니다. 그런데 인문학 대중화를 한다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게 합니다. ‘동원의 인문학’입니다. 자치든 학문이든 전 세계적인 패러다임이 ‘동원’에서 ‘동행’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목하자는 겁니다.

  • 끝으로 인문사회 분야 연구 활성화를 위해 꼭 강조하거나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학이 인문사회 지식을 공급하는 독점적 생산자의 지위를 이미 오래전에 상실했다는 사실을 연구자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지식 생산자로서의 대학, 지식 소비자로서의 사회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 사회과학적 담론이 생성되는 곳으로 연구자가 찾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저 역시 본부장에게 맡겨진 임무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아낌없는 비판과 격려, 그리고 많은 관심 당부 드립니다.                                            

박구용 본부장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심한 내적 갈등, 불협화음을 겪었다. 학교보다 서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시절이라고 본인은 회고했다. 철학에서 답을 찾고 싶어 전남대 철학과를 선택했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재)5·18기념재단 기획위원장과 광주시민자유대학 이사장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우리 안의 타자>, <부정의 역사철학>, <코리안 디아스포라:공저> 등이 있으며 <도구적 이성 비판>, <정신 철학> 등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한 줄 인터뷰

01.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나 인문학자는?

“해외는 헤겔과 아도르노, 국내는 윤두서와 김수영”

사유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철학자는 헤겔, 지금도 가슴 떨리게 하는 철학자는 아도르노다. 국내에서는 공재 윤두서와 김수영 시인을 가장 좋아한다. 윤두서는 국내 최초의 인문학자였고, 김수영은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표현한 시인이다.

02. 일할 때의 원칙이나 자세가 있다면?

“생각은 비판적으로, 실천은 낙관적으로”

사고나 이론은 비판할 수 있는 만큼 비관적으로 하되, 실천에 옮길 때는 낙관적으로 임해야 한다. 생각은 무조건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면서 정작 실천에 옮길 때 비관적이거나 비판적이 되면 일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

03. 인생철학으로 삼는 격언·문구

“폭력의 최소화, 자유의 최대화”

내가 공부하는 이유, 철학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누군가의) 자유를 최대화하면서도 누군가에게(나에게) 아무런 폭력이 되지 않는 그런 삶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