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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저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국정전문대학원 배수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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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저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국정전문대학원 배수호 교수

사람은 망망대해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일 수 없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엮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자신이 속하는 무리 속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정서적인 안정감과 행복을 누린다.

우리는 오랜 공동체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공동체 지향의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을 보유하고 있다. 한때 가족, 지역사회 등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말과 행동, 선택이 제한을 받기도 했던, 지나치게 ‘하나됨의 공동체’를 강조하여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던 과거 시절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공동체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낯설다. 나의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의 엮임과 교류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채 외로이 살고 있다. 우리에게 공동체는 시간이 갈수록 낯설어지고 있다.

근래 들어 공동체 정신의 소멸, 공동체의 와해라는 말들이 자주 회자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다시 공동체를 복원하고 활성화하자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많은 정책적 관심과 자원을 마을만들기,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협동조합 등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격동의 근현대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 서세동점,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 해방 후 좌우대립, 6.25전쟁, 군부독재 등 격동의 근현대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공동체의 삶에서 답을 찾아볼 수 있다.

한때 ‘계의 나라’라고 할 만큼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계 조직들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 지금도 ‘친목계’, ‘상조회’, ‘동창회’ 등 명칭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유산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지역공동체와 구성원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공동체의 주요 현안들을 함께 해결하던 동계(洞契)와 촌계(村契)와 같이 일반 목적성을 띤 계 조직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특수한 목적성을 띤 계 조직들도 활발하게 결성되고 운영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올수록 하층민들의 의식 성장, 신분질서의 해체, 촌락의 분화, 사회경제의 발전과 함께 여러 계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소나무, 참나무, 퇴비용 풀 등 산림공유자원을 지속가능하게 이용하고 보호·관리하기 위한 금송계(禁松契) 및 송계(松契), 동네 주민의 자제 교육을 위한 서당 설립, 훈장 초빙 및 보수, 전답 운영, 학용품 구입 등을 위한 학계(學契) 및 서당계(書堂契), 농사에 필요한 물을 확보하고 관리하기 위한 보계(洑契) 및 수리계(水利契), 농사에 필요한 소나 말을 공동으로 구매하기 위한 우계(牛契) 및 우마계(牛馬契), 장례 시에 상여 운반과 산역 작업을 위한 상여계(喪輿契), 계원에게 일정 기금을 걷어 이자 놀이로 재산 증식을 위한 식리계(殖利契), 동년배들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동갑계(同甲契), 친족 간의 결속 및 친목 도모, 조상 제사, 선영 보호 및 관리를 위한 문중계(門中契) 등이 있었다.

공동체와 지역공동체에 관한 조상의 지혜

하지만 공동체 삶과 전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고 이촌향도와 도시화의 급류 속에서 많은 공동체 자료와 정보들이 망실되어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사회과학에서도 완문(完文), 규약(規約), 좌목(座目), 수계기(修契記) 등 공동체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들을 발굴하고 새롭게 되살리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열정을 적극 쏟아야할 시점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조선후기부터 오늘날까지 유지, 전승되어오고 있는 지역공동체와 공동체 조직에 대한 종단적(longitudinal) 사례연구들을 진행해오고 있다. 이제까지 수행해왔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지역공동체에 관한 조상의 지혜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 조상들은 구성원 간 공동체 정신과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 당산제, 용왕제, 정월대보름 축제, 백중놀이 등 공동체 제의와 축제를 통해 지역공동체와 구성원에게 지역적 정체성과 유대의식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는 마을 도로 건설과 보수, 마을 산림자원 보호와 관리, 농사철 공동 노동, 부역 등 공동울력에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참여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공동체 조직을 운영하면서 회의 및 결의 내용, 수입 및 지출 내역 등을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기록하였다. 구성원에게서 일정 금액과 곡식을 갹출하여 계 기금을 마련하고 예측 못할 재난 상황을 공동체 차원에서 대비하였다. 계 기금에서 쌀을 구입하고 간장을 담궈 춘궁기에 기아 상황을 대비하였다. 공동체 소유의 전답이나 산을 구입하여 공동체의 번영을 꾀하였고 차일(遮日), 가마, 상여(喪輿), 사모관대(紗帽冠帶), 병풍(屛風), 함(函), 밥상 등 공동물품을 마련하여 공동체와 구성원의 크고 작은 행사에 활용하였다. 마을에 서당을 짓고 훈장을 초빙하여 마을의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이게 바로 공동체의 힘이 되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 과거로부터 배우다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삶을 보장받고 정서적 안정감을 얻게 되며, 위기에 처했을 때는 공동체 울타리 속에서 함께 이를 극복해나간다. 조상들의 삶 속에는 공동체의 지혜가 충분히 묻어있다. 이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오늘날 우리 현실과 맥락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과업이다. ‘오래된 미래’는 바로 우리 조상의 공동체 삶과 전통에 남아있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우주 진출이 본격화되는 요즘 시대에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사람이 살아갈 세상이라면 과거 조상의 지혜와 혜안으로부터 얻어낼 바가 많지 않겠는가.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공동체의 전통과 지혜가 곳곳에 남아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여러 공동체 조직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던 어르신들도 계신다. 공동체에 관한 ‘경험의 보고’인 그분들로부터 생생한 경험과 지혜를 발굴하고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시급해 보인다.

안동군 북후면 축우계 표지

안동군 북후면 축우계 내용 일부

필자는 평소 전국을 다니면서 지역공동체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어르신들을 뵙고 그분들의 경험담과 지혜를 기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작년부터 이런 즐거움이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진정 되는대로 다시 배낭을 꾸려 전국을 누빌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배수호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국정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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