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월호 신진연구자 “톡”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원나라 정치서를 읽은 까닭은?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송재혁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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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태조 이성계와 그의 신하들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선의 건국자들은 오랑캐가 세운 원나라를 부정했지만, 흥미롭게도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서재에서는 원나라 시대의 서적들이 발견됩니다. 근대 서구의 관념인 민주화, 근대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의 틀로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이해하던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해석을 고민하는 송재혁 박사는 정도전의 서재에 꽂혀 있던 책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정도전을 통해 조선 초기의 국가 건설과 그 모델을 찾는 과정은 현대 대한민국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학자의 길을 고민하는 송재혁 박사를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에서 만났습니다.

part1. 연구자의 길

한국의 역사 속 정치를 현대 정치학의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박사님의 주요 연구 주제를 소개해 주세요.

“조선의 건국자들은 어떤 국가를 만들고자 했을까요?” 저는 그 답을 찾아 당대의 정치가들이 읽고 활용한 책들을 중심으로, 조선 초기의 정치이론가들이 구상한 국가론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대학원 전공으로 정치학과 철학, 역사가 만나는 정치사상을 공부했습니다. 현재는 정도전(1342~1398)과 세종(1397~1450)에 대한 단행본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과 조선 건국기 정치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정도전은 건국 초창기에 ‘조선을 어떤 국가로 만들 것인가?’란 질문에 맞서 당시대의 모든 모델들을 검토하고, 종합한 인물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해석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학원에서 정치사상을 공부하며 느낀 점은 기존의 연구들은 서구 근대의 정치적 경험을 보편성으로 가정하고, 이를 통해 전근대 조선의 정치를 분석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시대정신이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정도전을 연구한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의 전근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태종 이방원에게 제거된 정도전의 ‘근대성’을 부각시킨 바 있습니다. 앞선 연구 성과를 수렴하여 발전시킬 때 학문은 지속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정치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롭게 서술하는 출발점으로 조선을 가장 먼저 설계한 정도전을 연구대상으로 선택했습니다.

독립 연구자로 성장하며 걸어온 길을 간략히 소개해주세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15년간 공부하며, 조선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혔습니다. 외국의 경우 정치학 연구의 기반으로 역사철학, 연구방법론, 이론 세 가지를 꼽는데요. 여기에 더해서 한국정치사상은 전통적인 문사철까지 필요로 합니다. 이 때문에 철학과와 한국사학과에서 대학원 강의를 듣기도 했고, 한문으로 된 자료들을 읽기 위해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번역과정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사후과정을 수행하고, 2019년부터는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개인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part2. 내가 하는 연구는?
조선 초기의 국가 건설과 그 모델

지난해부터 학문후속세대지원사업을 통해 정도전의 대표작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의 인용자료를 분석하셨습니다. 연구의 배경과 목적도 소개해주세요.

‘재상이 중심인 나라’를 정도전이 구상한 정치질서의 핵심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입니다. 이는 근대에 서구가 경험한 ‘권력의 분할’,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강조한 결과입니다. 제 박사 논문은 기존 학설과 달리 정도전이 활용했던 전통시대의 정치적 자원을 바탕으로 그의 정치적 구상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박사후 과정에서는 조선에서 동아시아로 연구의 지평을 넓혀, 원·명 교체기에 신왕조인 명(1368~1644)의 건설에 협력했던 송렴(1310~1381)과 방효유(1357~1402)와 같은 금화학파 학자들의 정치질서 구상을 정도전의 구상과 비교하여 정도전이란 인물의 보편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정도전은 외교사절로 명에 세 번이나 파견돼 국제 정세에도 밝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앞의 두 연구에서는 정도전의 사상과 송명 정치질서의 뚜렷한 연관성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연구들을 통해 정도전이 인용했던 책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과제에서는 정도전이 저서를 편찬하며 인용한 자료를 전수조사하여 이를 토대로 정도전이 구상한 국가론을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과 그의 시문을 모은 <삼봉집>(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조선 초기 정치 모델을 조망하기 위해 정도전이 활용한 책들을 분석하는 이유가 있나요? 더불어 연구 방법도 설명해주세요.

1402년에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아프리카를 포함한 최초의 세계지도입니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어떻게 이런 지도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많은 연구자들이 밝힌 것처럼, 몽골 제국의 유산 덕분입니다. 옛 책에는 당대의 지식과 사상이 결집되어있고, 정치가들은 이를 활용하여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은 정치인의 수사로는 오랑캐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부정했지만, 실제 새로운 국가의 설계에는 원 제국의 정치적 경험과 사상 같은 유산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정도전의 이러한 작업은 태종과 세종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초기의 국가건설 과정에서는 고전 속의 옛 제도와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그리고 명나라까지 다양한 모델이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도전은 중국 역대 왕조의 다양한 모델을 검토하고 추출하여 자신의 저작에 담았습니다. 저는 정도전이 각 저작에서 기술한 본문을 우선 청나라 건륭제가 집대성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실린 책들과 비교하고, 나아가 사고전서에 실리지 않은 조선 초기에 활용된 책들과도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정도전이 창작했거나, 인용했거나, 요약, 변형한 부분들을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402년 조선에서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규장각 모사본)

조선 초 학자정치가들이 어떤 자원을 갖고, 어떤 정치 모델을 구상했는가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이끌었습니다. 학문후속세대양성사업 1차년도 연구의 주요 성과 및 앞으로의 진행 계획도 소개해주세요.

정도전은 1394년에 정부론을 다룬 <조선경국전>, 1395년에 관료론을 다룬 <경제문감>, 1397년에 군주론을 다룬 <경제문감별집>을 편찬하였습니다. 1차년도 연구에서는 정도전이 각 저작에서 인용한 자료를 전수 조사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조선경국전>의 경우, 원나라의 법전인 <경세대전>의 서문을 모은 <경세대전서록>을 활용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정도전은 개국 이후 급히 원 제국의 정치모델을 검토하여 새로운 정부의 조직과 조직의 운영 모델을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로 <경제문감>은 송나라 시대의 유서를 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 제국 시대의 정치적 성과를 은폐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세 번째로 <경제문감별집>은 <십칠사찬고금통요>, <역조통략>과 같이 원 제국 시기의 신유학의 학문적 성과를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차년도에는 정치이론가로서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적 기획을 ‘모방’, ‘은폐’, ‘재구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예정입니다.

조선건국 이후 정도전의 세 저작과 주요 인용자료(컬러 글씨가 1차년도 연구로 밝혀낸 자료)

박사님의 연구 결과가 현대 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정도전을 다루는 작업은 추후 “조선이란 국가를 당대의 정치가들이 어떻게 설계했고, 그것은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가?”를 밝히는 작업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입니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형성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 형성과정을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님 책임 하에 진행 중인 한국연구재단 공동연구과제 “고려인은 어떻게 조선인이 되었나?: 백년(1351~1450) 간의 프로젝트”에서 정부구조 부분을 제가 맡고 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이 어떻게 설계되었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헌국회의 국회회의록을 보면 국부 이승만은 초기에 미국의 모델을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정도전이 터부시했지만 원 제국의 유산을 활용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출발에서 식민지 시기 일본제국이 남긴 유산의 영향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연구를 진행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요?

정도전이 활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료 중에서 없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연구에 빈틈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정도전 본인이 그대로 자료를 인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출하고 변용한 것들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앞으로 정도전을 전후로 한 시기의 정치가들에 대해서도 작업을 확대할 예정인데, 정도전 이전 시기의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배가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part3. 나의 연구 원동력&경쟁력

박사님만의 연구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꾸준함입니다. 정치학의 학문적 분과 중에서 정치사상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고, 이 중에서도 한국정치사상을 전공하는 연구자는 극소수입니다. 저는 그동안 정도전이라는 하나의 인물에 대해 꾸준하게 연구를 축적해 왔습니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지난해 발표한 논문은 역사학 분야 저널인 <한국사연구>와 <한국사상사학>에 발표하며 분과학문에 갇히지 않고 학문간 교류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정도전에 대한 연구를 쌓아 가면, 앞으로 정도전에 대해서는 학문적 분과를 넘어 최고의 연구자가 될 것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연구 분야에서 궁극적으로 도전하고 싶은 연구 목표는 무엇인가요?

정도전 연구를 통해 쌓은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면, 조선 초기의 국가 건설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중간 단계로서 세종의 일생을 그가 읽고 만든 책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평전을 쓰고 있습니다. 추후 ‘정도전의 서재’라는 현재의 연구 과제를 확대해, ‘조선 초기 지식인의 서재’라는 제목으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수많은 정치이론가의 정치적 구상을 그들이 활용한 책들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싶습니다.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 또는 신념이 있나요?

정도전에 대한 연구사에도 볼 수 있듯이, 연구자는 현재적 관점을 가지고 연구의 대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도 동일한 한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연구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현재적 의미를 모색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저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최대한 이해하고 나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인물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연구 이전에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연구 신념입니다.

신진연구자로서 연구재단에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수요가 많지 않은 한국정치사상이라는 학문적 분과를 전공했지만, 박사후국내연수지원사업과 학문후속세대양성사업 등 연구재단의 연이은 지원 덕분에 독립된 연구자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야기 하듯 사회과학을 포함한 인문분야의 위기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한편으로 경제력이 안 되는 학문에 인재가 모이지 않기에 결국 학회와 같은 연구기반은 점점 약해지고 연구경쟁력도 저하되고 있습니다. 학문이 발전하려면 동료 학자들이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는 데 지금은 소수의 신진학자들이 각개전투로 연구를 꾸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의 학문분야가 없어지면, 한국의 정체성도 위협받기 마련입니다. 앞으로도 연구재단이 많은 지원을 통해 신진연구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아주길 바랍니다.

epilogue

한국의 역사 속 정치를 현대 정치학의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정치학자인 송재혁 박사는 올해 ‘세종 평전’과 ‘조선의 탄생: 정도전의 국가 구상과 원 제국의 유산’이란 두 권의 책으로 독자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조선의 국가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은 대중서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길 기대합니다.

이렇게 걸어왔습니다

2019.3~현재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선임연구원

2019.3~2020.6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

2018.9~2019.6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

2018.6~2019.5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 박사후과정 연수연구원

2016.3~2018.6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 및 연구처 연구교수

1999.3~2006.2

고려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학사 졸업

2006.3~2009.2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2007.3~2010.2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번역교육원 고전번역연구과정Ⅰ

2009.9~2016.2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연구모음zip
  • 조선 초기의 정치가(정도전, 세종, 황희, 성종 등)
  • 조선 초기의 서적과 국가 건설
  • 전근대 동아시아의 서적과 정치

내 인생의 책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혁명과 문명의 전환을 다룬 김영수 선생님의 <건국의 정치>(2006, 이학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고려 말 공민왕 대부터 조선의 건국에 이르는 40여 년(1352~1392)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사상을 다룬 대작입니다. 저자는 이 시기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정치와 사상 간의 복잡한 관계를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홍건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지만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스승을 애도하는 청년 정몽주의 사례를 통해 저자는 정치와 철학의 갈등이라는 정치철학의 근본적 문제를 짚었습니다. 저는 대학원 시절 이 책을 접하고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고, 한국정치사상을 전공으로 선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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