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저 가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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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엘스터의 『마르크스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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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 욘 엘스터

“코헨(G. A. Cohen)의 ≪칼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Karl Marx’s Theory of History)은 일종의 계시였다. 그 책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글을 쓸 때 따라야 할 엄격성과 명료성의 기준을 하룻밤 사이에 바꾸어 놓았다. …(중략) 연구모임이 결성되었고, 1979년에 처음 만난 후 해마다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내가 쓴 원고를 놓고 집중적인 토론을 했고, 고쳐 쓴 다음에 또 토론을 가졌다. 이 토론들이 이 책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략)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수년에 걸쳐 토론을 하는 사이에 우리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지 반문해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내용 중에서 이 모임에서 철두철미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그게 무엇인지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고, 설명할 능력도 없다. 이 책과 성격이 비슷한 책들이 잇달아 출간되고 나면,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날 것이다.”

-[욘엘스터, 『마르크스 이해하기1』, 나남, p.11]

욘 엘스터(Jon Elster)는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한 사조 중 하나인 분석적 마르크스주의(Analytical Marxism)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는 방법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텍스트를 읽는다면, 그는 오늘날의 표준적인 과학적 접근방법, 즉 ‘분석적으로’ 텍스트를 읽기 때문이다. 또한 흔히 마르크스주의의 고유한 방법론으로 알려진 변증법적․전체론적 접근, 기능적 설명, 목적론적 해석 등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스터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이론적․경험적 문제들은 전부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연구의 결과들은 비록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상당히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문제 자체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해 온 것과 같다. 이들의 전형적인 연구형태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명제나 논증을 선택해 그 논증이 성립할 수 있는 필요조건들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그 명제나 논증을 재구성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개념들도 역시 마르크스주의적 논의에서 주로 등장하는 언술들이다.
둘째,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규범을 공유한다. 학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과 이러한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으로서의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믿음 등이 이들의 가치관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가치들을 마르크스주의적 언어를 통해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즉 이들은 마르크스가 제기한 자본주의에서 소외와 착취, 계급투쟁, 혁명, 사회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사용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인류의 열망을 표현했고,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이론적 작업을 수행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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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모습

마르크스의 ‘합리적 핵심’과 ‘방법론적 개체론’

엘스터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의 주장 중에서 비과학적인 것은 버리고, 설득력이 있는 것만 찾아내 오늘날의 표준적인 과학적 설명 형태로 재구성하여 제시한다. 엘스터가 생각하고 있는 과학적 설명이란 ‘방법론적 개체론(methodological individualism)’에 입각한 설명으로, 이러한 독해만이 마르크스의 ‘합리적 핵심(rational kernel)’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핵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논의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엘스터에 따르면, 사회과학적 설명에는 세 층위가 있다.

① 욕망이나 신념과 같은 정신적 상태에 관한 인과적 설명
② 전제된 욕망 또는 신념의 관점에서 개별적인 행동을 설명하는 의도적 설명
③ 개별적 행동의 관점에서 그것이 낳은 집합적 현상을 설명하는 인과적 설명

-[욘엘스터, 『마르크스 이해하기1』, 나남, p.20]

엘스터는 이 세 층위의 설명만이 ‘과학적’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파업이라는 집합적 현상을 설명할 때, 노동자 개개인이 파업에 참여한 의도를 설명하는 것은 ②에 해당한다. 즉 파업참가자의 파업행위의 목적―임금인상 등―을 제시함으로써 파업이 일어난 이유가 설명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 중에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불참 이유는 현재의 임금수준에 만족해서, 혹은 파업의 성공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라서, 혹은 파업 후에 받게 될 보복이 두려워서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불참자(혹은 참가자)가 불참(혹은 참가)의 결정에 이르게 된 정신적 과정을 밝히는 것이 ①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파업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또한 전혀 예기치 못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처럼 행위자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이러한 ‘비의도적 결과’를 인과적으로 추론 또는 예측하는 것이 ③에 해당한다. 엘스터는 마르크스가 사회과학 방법론에 특별히 기여한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설명 형태라고 말한다.
특정한 행위와 그러한 행위를 한 의도와의 관계는 비교적 밝히기 쉽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른 의도를 갖게 된 이유는 개개인의 욕망, 신념 등과 관계 때문에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어렵다. 또한 개인의 행위가 초래할 미래의 결과에 대한 예측도 매우 어렵다. 특히 예측하고자 하는 시점과 행위시점 간의 기간이 길수록 매개변수가 많아져 예측은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세 층위의 설명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인’이다. 의도는 인간 개개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연이나 사물은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며, 의도를 가진 초월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 자본가 계급 등 집단도 의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사회구조, 제도 등도 개개인의 의도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의도의 주체는 아니다.
방법론적 개체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 인한 모든 사회현상의 구조와 변화는 원칙적으로 오직 개개인의 속성, 목표, 신념, 의도, 행동만을 원인변수로 삼는다. 또한 과학의 목표가 법칙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라면, 사이비설명이 되지 않기 위해 원인과 결과 간의 기간을 가능한 한 줄여야한다.

“설명이란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것이며, 블랙박스를 열어 볼트와 너트를, 톱니와 톱니바퀴를, 욕망과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집합적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욘엘스터, 『마르크스 이해하기1』, 나남, p.22]

엘스터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경제주체들의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들이 그 체제와 이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그러한 신념은 체제의 산물이자 동시에 체제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마르크스는 모든 경로―개인적 수준에서 집합적 수준까지, 정태적 분석에서 동태적 분석까지, 경제적 수준에서 사회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수준까지―를 샅샅이 탐색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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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이해하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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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이해하기2

진석용 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쿠마모토학원대학 교환교수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현재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1992)《한국정치․사회개혁의 이념적 기초》(공저, 1998) 등이 있고, 역서로는《신기관》(2001),《서양정치철학사》(공역, 2007),《리바이어던》(2008),《무정부사회》(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