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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현장탐방

격랑의 동북아, 인문학으로 새 판 짠다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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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동북아시아는 오랜 시간 세계열강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혀 온 갈등과 분쟁 지역이다. 정치·군사와 같은 전통적 힘의 논리로는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는 요즘,

인문학을 통해 동북아 공동번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연구자들이 있다.

서재에서 현장으로

원광대는 유일하게 인문한국(HK)사업과 동시에 작년 11월 인문한국플러스(HK+) 해외지역 분야 대형 사업에 선정되어 글로벌 화두가 되었다. HK+(Humanities Korea+)는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세계적 수준의 인문학 연구소 육성 사업이다. 선정된 대학은 연구 성과의 지속적인 공유와 확산을 통해 해당 지역사회의 인문학 거점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학교 측의 대응자금을 포함 7년 동안 총 14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대형 국책사업인 만큼 원광대, 특히 공모 과정을 주도한 한중관계연구원에는 각계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한중관계연구원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동북아 갈등의
해결방안을 찾는다”는 역동적인 의제로 다른 지원
대학들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권홍 한중관계연구원장은 “일찍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 전반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여온 원광대의 저력이 HK+ 선정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원광대가 해외문제 특성화를 대학 발전 전략으로 삼게 된 것은 전임 정세현 총장의 의지였다. 한반도와 국제관계 전문가로 명성이 높은 정 전 총장은 중국의 급부상과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공동발전을 모색하는 현장연구에 원광대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았다.

HK+해외지역 분야 대형 사업에 선정된 원광대

유권홍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소장

이에 따라 2013년 설치된 한중관계연구원은 산하에 양국 간 법률, 역사문화, 정치외교, 통상산업 분야를 다루는 전문연구소를 두고 한중 간 현안해결과 교류확대에 필요한 대응방안들을 제시해왔다. 이 같은 움직임은 현 김도종 총장 부임 이후 더욱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김 총장은 중국 특성화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시아 중심대학’을 표방하며 한중관계연구원의 외연 확장에 더욱 힘을 싣게 된다.

대학 전반의 든든한 화력지원 속에 한중관계연구원은 지난 5년 간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재의 인문학에서 현장의 인문학으로’란 비전 아래 인문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접학문 간의 융합연구를 통해 중국을 넘어 동북아시아권 전반에 해박한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동북아의 정치·제도적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방안들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이 같은 노력은 총 5차례의 대규모 국제컨퍼런스와 국내학술대회, 중국 주요대학들과의 빈번한 연구협약, 정기적인 언론 기고와 단행본 서적, 특히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재후보지로 선정된 ‘한중관계연구’ 등 눈에 띄는 결과물들을 양산했다.

한국 인문학의 새 역할 '동북아 피스메이커'

원광대는 한중관계연구에서의 지속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HK+ 사업에서는 보다 진일보하고 도전적인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동북아 공동번영을 위한 동북아시아다이멘션(NEDA) 토대 구축: 역사, 문화 그리고 도시’가 그것이다.

한마디로 "동북아의 안정과 통합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인문학을 바탕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자칫 지나치게 이상적인 목표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할 법하다. 유 원장은 “실제로 HK+ 선정과정에서도 심사위원들의 질문 포화가 집중된 문제”였다며 웃음을 지었다.

국내 한 대기업이 중동 지역 석유기업과의 거래 중에 크게 곤욕을 치른 일이 있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그 지역 사람들이 불경하게 여기는 왼손으로 물 잔을 건넨 것이지요.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초대형 계약이 무산될 뻔한 것인데, 서로의 인문지리적 배경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없이는 정치·경제적으로도 장기적으로 신뢰 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이번 HK+ 사업의 기저에도 이런 실제적 경험들이 깔려 있습니다.

첨예한 갈등의 현장인 동북아

동북아 갈등해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중인 HK+ 사업

선정 심사 중 연구대상 지역이 남북·중·일을 넘어 러시아과 몽골까지 포함하면서, 어젠다 또한 너무 넓다고 지적한 위원도 있다. 역사, 문화에 도시라는 지정학적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는 연구주제 역시 광범위하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대해 한중관계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독도(한·일), 조어도(중·일)와 남사군도(중·대만 등 6개국), 북방 4개 섬(러·일), 양안(중·대만) 같은 영토갈등을 비롯해 남과 북, 미일과 중러의 대립까지 동북아는 언제 무력충돌이 빚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첨예한 갈등의 현장입니다. 동북아의 상시적인 평화와 공동번영은 서로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어, 문화,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인문학적 교류를 통해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경제·문화적 협력을 추진하자는 것입니다.

유 원장은 “국가 간 힘의 외교와 언제든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 있는 협정과 협약에 의존해서는 동북아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한중관계연구원이 도시 차원의 접근방법, 즉 새로운 다이멘션(Dimension)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롄과 오사카, 하바로프스키와 같이 주변국의 역사와 문화가 혼재된 이른바 ‘경계도시’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도시간 협력, 나아가 동북아 갈등해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중관계연구원은 이 같은 HK+ 사업의 새로운 의제 연구를 위해 ‘경계를 넘어, 마음을 연결하고, 공동시장을 구축하자’란 모토를 구축했다. 또한 세부 연구주제들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를 연구원 내에 설치하고 산하에 역사, 문화, 경제, 인문사회융합 분과를 구성하고 있다. 이와 함께 원광대의 국제적인 어젠다 연구에 동참할 베이징대,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일본의 동경대와 중부대 등 해외 유수 대학 및 관련 연구소들과의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내부에서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변화'

원광대 숭산기념관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가 주최하는 워크숍이 개최되고 있다. 새롭게 조직된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원광대 HK+사업의 새로운 의제를 이해하고 정치, 경제, 철학, 법학, 문학, 종교, 도시사회학 등 각 분야 간 융합연구의 기초를 닦는 자리이다. 이와 별도로 매달 1-2회씩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국내외의 다양한 선행 연구사례들을 검토하는 세미나도 진행되고 있다.

이들이 요즘 동북아 상생의 모델로 눈여겨보는 것은 유럽연합(EU)이다. 유럽연합의 제도적 통합은 정서적 동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혈연으로 얽힌 유럽 왕조사와 그리스도교, 알파벳과 로마법체계 등 여러 나라가 함께 공유해온 역사·문화적 경험이 당면한 정치·경제·군사·외교의 현실적 장벽을 넘는 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것이다.

동북아시아 역시 유럽 못지않게 깊고 다양한 역사·문화적 자산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판단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기 워크숍과 세미나 등은 이 같은 동북아 공동의 인문학적 자산을 자발적 네트워크와 협력적 관계로 진화시키기 위한 기초 작업에 해당한다. 연구소는 이를 통해 국가 간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부터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매주 분과회의를 통해 융합연구 방향을 모색 중인 연구진들

이들이 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비단 대외적인 연구정책뿐만 아니라 연구소 내부의 이해와 소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주 모여 분과 간 융합연구를 디자인하고 있는 16명의 연구진은 서로의 전공지식을 나누며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전에 없던 연구 테마들도 속속 잉태되고 있다.

영화이론 전문가인 이윤종 HK+교수는 “사실 대규모 학술대회가 아니면 다른 전공 분야의 지식을 접하는 것이 수월치 않다”라며 “다양한 전공자들과의 협업이 필요한 이번 사업이 개인적으로도 큰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동료 연구진과의 세미나 중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얻었다. 20세기 아시아권 영화에서 보이는 정서적 공통분모를 통해 미래의 동북아 감성 네트워크를 예측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근대문학과 문학교육을 전공한 문 신 연구교수 역시 개인 차원에서 고민했던 연구주제를 공동의 연구테마로 확장해가고 있다.

동북아는 식민시대와 전쟁,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 등에서 유사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공통의 기억들이 문학적으로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또 교과서를 통해서는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를 비교 분석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교과서는 국민 의식구조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동북아의 관계 지형도를 앞서 내다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역인문학센터 전승훈 연구원은 이렇게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가 배출할 연구 성과를 지역사회로 확대하는 사업들을 기획 중이다.

한중관계연구원은 HK+ 사업의 학문적 성과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파급효과 유발을 위해 지역인문학센터를 별도로 설치했다.

고대 한·중·일 3국의 허브였던 ‘백제’의 문화적 계승자이자 대학의 배후도시인 익산과 전라북도가 새롭게 시도되는 동북아의 인문학적 연대와 교류협력에서도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이윤종 교수, 전승훈 연구원, 문신 교수, 변효만 행정실장

한편 지난 3월 조직체계 정비를 마치고 1단계 HK+사업을 본격화한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는 올해 의제 연구의 토대가 될 기초자료 수집과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내년과 후년에는 ‘동북아시아다이멘션’의 실천적 로드맵과 함께 계량모델 설계와 효과분석, 현지실사를 통한 연구성과 구체화를 계획 중이다. 2021년경에는 정보통신기술(ICT)을 이용해 주요 연구 성과를 국내외로 확산할 모바일앱과 빅데이터 서비스도 추진될 예정이어서 기대가 크다.

유권홍 소장은?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며 변호사이다. 석유·가스 및 광물, 수자원, 환경 관련 세계 무대에서 법·제도 전문가로 활동하며 쌓은 국제 감각과 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HK+ 사업을 이끌고 있다. 한반도를 축으로 한 국제 에너지·철도망 구축과 함께 동북아시아 전반의 문화적 동질성을 테마로 한 대형 인문 다큐멘터리 제작 등도 주요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