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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현장탐방

‘순간에서 영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춤사위

한국예술종합학교 세계민족무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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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dancing)은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다.

말과 문자가 생기기 전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육체를 통해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예술로 발전시켰다. 몸짓 언어는 현대의 인류에게도
여전히 가장 순수하고 즉각적인 표현수단이다. 기다리던 월드컵 결승골이 터지는 순간,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부둥켜안고 펄쩍 뛰며 온몸으로
환희를 표현한다. 세계민족무용연구소는 이 원초적인 ‘영혼의 울림’을 텍스트와 무대예술로 체계화하고 있는 연구그룹이다.

민족무용의 학문적 재해석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불리는 서울 예술의 전당. 이곳의 한편에는 젊은 전문예술인을 양성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다. 발레와 현대무용,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고전무용까지 현란한 춤사위가 펼쳐지는 실습실들을 지나면 조금 전의 역동적인 분위기와는 또 다른 차분한 에너지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무용과 음악, 역사, 문학, 미학, 예술철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우리 민족무용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는 세계민족무용연구소(이하 연구소)다.

1999년 설립돼 곧 20주년을 맞게 되는 이 유서 깊은 연구소는 한국의 민족무용을 학술적으로 집대성하는
한편, 철저한 고증과 복원을 통해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공연문화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구소가 위치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캠퍼스

연구소가 발간한 학술총서들

이들의 노력은 특히 각종 사료의 정밀한 복원과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사람과 구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민족무용을 학문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데서 빛나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무용 문헌인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의 완역을 필두로 매년 춘앵전, 처용무 등 민족무용과 동아시아 각국의 예악문화를 분석한 학술총서를 쉼 없이 발표해왔다.

또한 부족했던 이론적 연구능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20회에 걸친 세계무형문화재 초청공연과
국제학술대회, 그리고 우리 전통무용의 정밀한 재연에 힘쓰며 한국 전통예술의 역량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장장 3년에 걸쳐 이어진
‘연경당 진작례’(演慶堂 進爵禮) 공연은 이 같은 노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연경당 진작례

‘진작례’는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왕실의 특별한 행사다. 특히 한국 전통무용의 황금기로 불리던 순조 28년 무자년(1828) 창덕궁 연경당에서 생신을 맞은 순원왕후를 위해 펼쳐진 진작례는 우리 춤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연구소의 복원작업과 학술서 발간은 대중적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이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허영일 소장은 2012년 제44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하게 된다.

“춤은 문화복합체…이론·현장 조화로 이해 넓혀야”

스무 해 전 2명으로 시작한 세계민족무용연구소가 24명의 제법 큰 연구소로 성장했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민족무용의 맥을 잇고 이론과 실제가 함께하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우리 세대와 후세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공연물로 발전시켜보고 싶었습니다. 주변의 관심, 그리고 젊고 유망한 연구자들의 참여가 아니었으면 가시화되기 어려웠을 일이지요.

허영일 소장

허 소장은 “중요한 길목마다 한국연구재단 지원사업들이 이정표 역할을 했다”며 “덕분에 구멍가게 같던 연구소가 슈퍼마켓, 다시 백화점처럼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에 힘입어 연경당 진작례 복원 프로젝트에 성공하며 역사상의 중대한 분수령을 맞은
바 있는 연구소는 2011년 다시 한 번 또 다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우수한 학자들을 결집해
특성화·전문화 연구거점을 육성하는 대학중점연구소에 선정된 것이다.

2016년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으로 열린 국제심포지엄

세계민족무용의 이해를 넓히고 있는 연구소

대학중점연구소 선정은 특히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부설 연구소란 특성상 공연과 문화콘텐츠 개발 역량에 강점을 가진 이곳에 ‘이론 연구능력’이란 또 하나의 날개를 장착하는 계기가 됐다. 허 소장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무용은 이론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큰 발전을 이루기 어려운 분야”라고 설명한다.

전통적인 악무 문화는 공통의 본질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론 접촉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굴절, 변형, 재창조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독자적 색채를 갖게 됩니다. 또한 사상과 시대상까지 반영하는 문화복합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춤과 음악의 제한적인 방법론만으로는 통합적으로 살피기에 한계가 있지요.

이에 따라 다양한 전공의 신진학자들로 새롭게 진용을 꾸린 연구소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전통무용을 ‘예·악·무(禮·樂·舞)’의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인류 공통의 언어인 세계 각국 전통무용과의 심층적인 비교 연구를 통해 우리 춤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재창조 향하는 한민족의 원초적 언어

현재 세계민족무용연구소의 연구진은 크게 대학중점연구팀과 콘텐츠개발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중점연구팀은 동아시아 전통 예·악·무 문화의 학술 연구와 현대적 활용을 담당한다. 콘텐츠개발팀은 해외 교류와 문화콘텐츠 개발, 악무문화 관련 지식정보의 학술 DB 구축을 맡고 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신태영 연구원, 허영일 소장, 최미연 연구원

재미있게도 다면적인 이해가 필요한 연구주제의 특성은 이들을 각자 전공 분야의 이론가로서 뿐만 아니라 ‘춤꾼’으로 이끌기도 한다. 한국한문학을 전공한 신태영 전임연구원은 우리 궁중무용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연구 중이다. 그는 또 처용무를 배워 공연도 하고 있다.

실제로 춤을 배우고 공연을 하면서 문헌자료만으로는 상세히 알 수 없었던 무대의 개념을 새롭게 알게 되었지요. 덕분에 의궤나 무보(舞譜, 악보처럼 춤 동작을 기록한 책)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태영 전임연구원

최미연 전임연구원은 한중일 3국의 궁중 춤을 무용인류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역사 기록물 상의 춤동작이 근대 이후 어떻게 전승되고 재현되는지를 분석하고 비교하는 작업이다. 환경, 문화, 종교, 신화 등과 연결해 춤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그 역시 “공간이란 춤의 배경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론 연구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낳는다.”고 강조한다.

설립 15주년 기념, ‘세계민족무용의 몸말’ 행사 中

한편 다양한 학제간 연구로 전통무용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온 연구소는 대학중점연구소지원사업 3단계를 맞고 있는 요즘, 동아시아 전통춤을 새롭게 변용하려는 실험이 한창이다.

이론과 공연현장의 결합을 넘어 우리 전통무용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간 수집한 방대한 분량의 문헌과 복식 등을 일반에
공개할 전문자료관 구축도 추진 중이다.

허영일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소장은?

이화여대 무용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도야대(東亞大)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 일본문학부 초빙교수와 한일 문화교류 정책 자문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전통무용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인들의 고른 지지 속에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집행위원장을 맡아 15년째 성공적으로 개최해오고 있다. 어린 시절 최승희의 춤을 배우며 무용에 입문한 그는 남북 간 무용 교류에도 관심이 크다. 민족정체성의 본질을 담고 있는 원초적 언어가 정치와 사상의 간극을 메우는 데 큰 기여를 하리라는 게 그의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