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TOP
연구현장탐방

신(新) 항암병법 “정상면역세포의 변심을 막아라”

경북대 종양이형성 및 네트워크제어 연구센터
SCROLL

암세포를 공격하던 정상면역세포가 돌연 마음을 바꿔 적의 편에 선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이병헌 센터장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병법서에 등장할 법한 포섭, 내통, 배신과 변절의 드라마가 암세포와 면역세포의 전투현장에서도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센터장과 종양이형성 및 네트워크제어 연구센터(이하 ‘센터’)의 동료 연구진이 암세포와 함께 주변 환경의 변화까지 예의 주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양 미세환경 속 비밀 네트워크

현재 많은 암 연구는 암세포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암세포와 주변 면역세포의 숨겨진 네트워크를 파헤치지 않고는 반복되는 재발과 전이를 막기가 어렵다는 게 이 센터장과 동료 연구진의 판단이다. 이를테면 ‘지피지기 백전불태’의 방법이다. 적뿐만 아니라 아군 내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양상을 모두 알아야만 효과적인 암 치료와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식세포(macrophage, 大食細胞)는 원래 체내의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입니다. 세균과 종양세포 등을 잡아먹는 우리 몸의 든든한 우군이지요. 하지만 대식세포는 종양과 싸우다가 종종 인간의 믿음을 배신하곤 합니다.”

면역세포 중 하나인 대식세포는 M1과 M2의 두 가지 형태로 분화한다. M1은 공격적인 대식세포다. 세균, 암세포와의 전투에서 일선에 서며 염증을 유발한다. 반면 M2는 항염증 효과와 조직재생으로 치열했던 전장의 흔적을 정리하는 후속부대 역할을 맡고 있다.

이병헌 종양이형성 및 네트워크제어 연구센터 센터장

그런데 암세포를 공격하던 M1이 종종 M2로 바뀝니다. 암세포가 M1 대식세포에게 도움이 되는 물질을 제공해 거꾸로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M2로 바뀐 대식세포는 종양의 혈관 신생을 도우며 종양의 생존과 전이에 필요한 물질을 제공하게 됩니다. 종양을 둘러싼 미세환경 속에서 적대관계가 협력관계로 뒤바뀌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센터는 종양 미세환경 속의 은밀한 네트워크를 차단할 방법을 찾고 있다. 기반은 먼저 종양의 복잡한
특성과 다양한 유래를 이해하는 ‘종양 이형성’ 연구다. 같은 암이라도 환자마다 특정약물에 대해 반응도가
다르고 전이와 재발이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일유전자 다양성(SNP), 마이크로 RNA 분석 등으로 항암약물 치료반응과 암 전이를 예측할 수 있는 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종양 미세환경 속의 네트워크 차단법을 찾고 있는 연구센터

“암 치료는 두더지 게임…정복에서 공존으로”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암세포와 주변 세포가 공생을 선택하는 ‘종양의 네트워크’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종양 이형성 연구에서 얻는 여러 가지 바이오마커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암세포와 종양관련 대식세포를 제어하는 기술을 발굴하고 이를 표적지향성 나노약물전달 기술과 접목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최근 의학계의 큰 관심사인 종양유래 엑소좀(정교한 RNA 및 단백질 운반물질이 들어 있는 작은 소포체)의 특성 분석을 통해 체내 합성과 작용을 제어하는 기술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암처럼 적응력이 빠르고 진화가 잘 되는 종양을 치료하는 것은 두더지 게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힘들게 암세포를 잡으면 엉뚱한 곳에서 변심한 M2 대식세포의 도움으로 또 다른 암세포가 재생되곤 합니다. 이에 따라 최근 암 연구의 목표 역시 완치와 정복에서 5년 생존율을 10년, 20년으로 늘리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고혈압처럼 관리만 잘 하면 더불어 사는데 문제가 없도록 말이지요.

연구센터가 위치한 경북대 의과대학 전경

지난 2014년 MRC에 선정된 동 연구센터는 지금 국내 유일의 종양이형성 및 네트워크 제어 연구기관으로 암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고 있다. 올해 초 1단계 평가를 완료하고 후반전에 들어선 센터는 남은 기간 좋은 연구 성과의 배출과 함께 우수한 의과학자 양성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현재 센터는 12명의 교수와 25명의 연구원, 대학원생 연구조원 42명 등 총 79명이 함께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차세대 의사과학자(physician scientist)를 꿈꾸는 2명의 학생연구원도 포함돼 있다. 이병헌 센터장은 “의과학은 특성상 연구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인내심 강하고 일견 무던한 사람에게 잘 맞는 연구분야”라고 말한다.

인내심 필요한 기초의학 연구…동료애가 큰 힘

기초의과학 연구자들과 관련한 책을 읽다보면 이런 얘기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내가 진료로 구할 수 있는 환자는 한정되어 있지만 좋은 연구, 좋은 약으로는 더 많은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긴 시간 과정을 함께할 동료애도 필요합니다.

이 센터장은 “MRC 같은 장기대형 연구과제에 함께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질책보다 격려와 응원이 서로에게 더 큰 힘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런 그의 믿음은 일선 연구원들의 목소리에서도 한결같다. 이영진, 임은주, 이윤기 연구원은 센터 내 서로 다른 연구실에서 각자의 연구테마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마치 한 연구실 소속인 듯 격의 없는 친밀감을 드러낸다.

이영진, 임은주, 이윤기 연구원

김상현 부센터장과 이병헌 센터장

교수님들 간에 연구 공유와 교류가 잦다 보니 연구실 간에도 사이가 좋아요. 연구원들도 각자 연구에 집중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다른 연구실을 찾아가 실험결과를 묻거나 데이터를 구하곤 하지요.

한편 선도연구센터 지원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이 국내 대학의 우수 연구역량을 결집해 장기간 특정 과제를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기초의과학 분야(MRC)는 의·치·한의대의 거점연구조직을 육성하여 자생능력을 갖춘 연구그룹과 우수인력을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10여 년의 준비 끝에 2014년 선도연구센터로 선정된 종양이형성 및 네트워크제어 연구센터에는 2021년까지 최장 7년간 91억 원의 연구비가 지원된다.

이병헌 센터장은?

경북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암학회 정회원, 세계분자영상학회 정회원,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본부 의약학단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학 시절 기초의학 연구에 뜻을 두고 생화학 분야를 전공했다. 2003년 모교의 교수로 부임한 뒤 현재 종양이형성 및 네트워크제어 연구센터장과 의과대학 부학장을 겸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