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를 막론하고 기본기 없이는 곧 한계에 부딪히는 게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한 나라의 미래인 과학기술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당장의 먹거리인 산업기술 개발에 치중해온 우리나라는 20세기 후반 나라살림이 펴지며 비로소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참을 앞서 있는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보다 과감한 중간진입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기초과학 역량을 빠르게 강화하는 거대과학(Big Science) 프로젝트입니다. 내년 완공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시설 중이온가속기가 대표적입니다. 즐겁다는 뜻의 우리말 ‘라온’으로 불리는 이 거대 과학시설을 기다리며 특히 더 마음이 더 설레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핵물리학 전문 연구그룹인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 구성원들입니다.
우주 탄생과 가속기
현대 입자물리학은 138억 년 전 태초의 우주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입자(elementary particle)들의 세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표준모형에 따르면 초기 우주에는 12개의 기본입자와 이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 힉스가 있었습니다. 빅뱅과 함께 탄생한 이들은 우주가 초고속으로 팽창하는 동안 충돌하고 결합하며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갔습니다. 3분 정도가 흘렀을 즈음 주기율표의 첫 번째 물질이 탄생합니다. 원시수소의 핵인 양성자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곧 다른 양성자, 중성자와 힘을 합쳐 더 큰 질량의 중수소, 삼중수소를 만들고 연쇄반응을 통해 한층 더 복잡한 헬륨, 리튬, 베릴륨, 붕소, 탄소, 질소, 산소 등으로 진화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된 핵과 가속기로 인공 합성한 핵, 이론적으로 존재가 예측되는 핵들을 보여주는 핵종 도표
핵물리학자들은 이렇게 원소와 별과 생명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우주 탄생의 비밀을 푸는 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처음 몇 분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나 지금과 같은 세상이 이뤄지게 됐는지가 큰 관심사이지요. 입자 가속기는 이들이 우주 탄생 과정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돕는 거대 실험 장치입니다. 양성자, 이온, 전자 같은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해 다른 물질을 때리면 과녁이 된 물질은 엄청난 충돌 에너지 때문에 구성요소들을 묶고 있던 힘이 붕괴되며 더 잘게 나뉩니다. 이렇게 부서진 입자들을 통해 138억 년 전 대폭발 직후 존재했던 초기 우주 물질들의 성질과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가속기인 미국의 사이클로트론(1925)을 시작으로 기초과학 선진국들은 속속 대규모 자원과 인력, 기술력이 투입되는 대형 가속기를 건설해 왔습니다. 2012년 신의 입자 힉스를 발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 강입자가속기, 아시아 최초로 주기율표에 새 원소 니호늄을 등재한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RIBF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중 현존하는 세계 최대 가속기인 CERN의 강입자가속기는 둘레 길이만 27km에 이르는데요. 이 가속기를 건설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투입한 재원은 무려 14조 원에 이릅니다.
CERN의 강입자가속기(LHC)
가속기의 발전은 우주 탄생 직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희귀 핵이나 고온·고밀도 핵물질들을 속속 발견할 수 있게 하며 핵물리학을 제2의 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현재까지 주기율표에 배열된 118개 원소 중 1번 수소부터 92번 우라늄까지는 자연계에서 발견했습니다. 나머지 26종은 지난 70여 년 간 가속기를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속기는 이제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의 약 20%가 관련 연구에서 배출된다고 할 만큼 세계 기초과학의 중추로 자리 잡았습니다. 따라서 거대 가속기를 보유한 국가에는 우수한 두뇌들의 유입이 필연적입니다. 우리나라의 핵물리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가속기 보유국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의 우수한 과학자들에게 가속기 빔 이용시간을 할당하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홍병식 센터장은 “자체 가속기가 있고 없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토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