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월호 생생 연구현장

우리 땅에서 풀어가는
중성자별의 비밀

선도연구센터지원사업(SRC)
고려대학교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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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막론하고 기본기 없이는 곧 한계에 부딪히는 게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한 나라의 미래인 과학기술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당장의 먹거리인 산업기술 개발에 치중해온 우리나라는 20세기 후반 나라살림이 펴지며 비로소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참을 앞서 있는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보다 과감한 중간진입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기초과학 역량을 빠르게 강화하는 거대과학(Big Science) 프로젝트입니다. 내년 완공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핵심시설 중이온가속기가 대표적입니다. 즐겁다는 뜻의 우리말 ‘라온’으로 불리는 이 거대 과학시설을 기다리며 특히 더 마음이 더 설레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핵물리학 전문 연구그룹인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 구성원들입니다.

우주 탄생과 가속기

현대 입자물리학은 138억 년 전 태초의 우주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입자(elementary particle)들의 세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표준모형에 따르면 초기 우주에는 12개의 기본입자와 이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 힉스가 있었습니다. 빅뱅과 함께 탄생한 이들은 우주가 초고속으로 팽창하는 동안 충돌하고 결합하며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갔습니다. 3분 정도가 흘렀을 즈음 주기율표의 첫 번째 물질이 탄생합니다. 원시수소의 핵인 양성자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곧 다른 양성자, 중성자와 힘을 합쳐 더 큰 질량의 중수소, 삼중수소를 만들고 연쇄반응을 통해 한층 더 복잡한 헬륨, 리튬, 베릴륨, 붕소, 탄소, 질소, 산소 등으로 진화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된 핵과 가속기로 인공 합성한 핵, 이론적으로 존재가 예측되는 핵들을 보여주는 핵종 도표

핵물리학자들은 이렇게 원소와 별과 생명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우주 탄생의 비밀을 푸는 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처음 몇 분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나 지금과 같은 세상이 이뤄지게 됐는지가 큰 관심사이지요. 입자 가속기는 이들이 우주 탄생 과정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돕는 거대 실험 장치입니다. 양성자, 이온, 전자 같은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해 다른 물질을 때리면 과녁이 된 물질은 엄청난 충돌 에너지 때문에 구성요소들을 묶고 있던 힘이 붕괴되며 더 잘게 나뉩니다. 이렇게 부서진 입자들을 통해 138억 년 전 대폭발 직후 존재했던 초기 우주 물질들의 성질과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가속기인 미국의 사이클로트론(1925)을 시작으로 기초과학 선진국들은 속속 대규모 자원과 인력, 기술력이 투입되는 대형 가속기를 건설해 왔습니다. 2012년 신의 입자 힉스를 발견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 강입자가속기, 아시아 최초로 주기율표에 새 원소 니호늄을 등재한 일본 이화학연구소의 RIBF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중 현존하는 세계 최대 가속기인 CERN의 강입자가속기는 둘레 길이만 27km에 이르는데요. 이 가속기를 건설하기 위해 유럽연합이 투입한 재원은 무려 14조 원에 이릅니다.

CERN의 강입자가속기(LHC)

가속기의 발전은 우주 탄생 직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희귀 핵이나 고온·고밀도 핵물질들을 속속 발견할 수 있게 하며 핵물리학을 제2의 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현재까지 주기율표에 배열된 118개 원소 중 1번 수소부터 92번 우라늄까지는 자연계에서 발견했습니다. 나머지 26종은 지난 70여 년 간 가속기를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가속기는 이제 노벨상 과학 분야 수상자의 약 20%가 관련 연구에서 배출된다고 할 만큼 세계 기초과학의 중추로 자리 잡았습니다. 따라서 거대 가속기를 보유한 국가에는 우수한 두뇌들의 유입이 필연적입니다. 우리나라의 핵물리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초과학 연구를 위해 가속기 보유국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전 세계의 우수한 과학자들에게 가속기 빔 이용시간을 할당하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홍병식 센터장은 “자체 가속기가 있고 없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토로합니다.

중성자별을 향해

홍병식 센터장과 안정근 교수

한국의 핵물리학계는 국내의 작은 사이클로트론이나 양성자가속기로 간단한 실험을 할 수 있었지만, 우주의 진화를 밝히는 데 가장 중요한 핵반응 실험은 100% 해외 가속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가속기 보유국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학문적인 우수성만으로 이용권한을 부여한다고는 하지만 주기적인 유지보수와 상업적 이용 등으로 가속기 가동시간이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팔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굽기 마련입니다. 어렵게 이용시간을 할애 받더라도 몇 년을 기다리다 취소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합니다. 또 해외 가속기를 이용하려면 실험에 필요한 검출기 등의 장비를 가져가야 하는데 부피도 크고 예민한 데다 아예 이전 설치가 불가능한 장치들도 많습니다. 여건이 이렇다보니 연구자들의 고충도 고충이지만 더 큰 문제는 국내에서 학문후속세대를 길러내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것이지요.

홍병식 센터장,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중이온가속기 라온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해외 가속기에 더부살이를 해온 국내 핵물리학자들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홍 센터장은 “지난 10여 년에 걸친 라온 구축 과정은 기초과학 발전에 대한 국민과 정부의 이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며 “이런 범국가적 이해와 협력에 답하는 길은 이제 라온을 통해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양산하고 우리나라가 선도적인 기초과학 강국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2018년 한국연구재단 선정 SRC로 출범한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는 이런 핵물리학계의 오랜 염원과 희망을 현실화할 한국 최초의 핵물리학 연구그룹입니다. 그간 우리나라의 핵물리학 연구자들은 각 대학에 흩어져 개별적으로 해외 가속기를 이용하며 ‘각자도생’ 방식의 연구를 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중이온가속기 라온과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중심으로 연구역량을 결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 개소식

센터의 연구 목표는 ‘입자 가속기를 이용한 핵충돌 실험과 새로운 실험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는 강한상호작용 유효이론 개발’입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하면 우주 탄생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밝혀내는 것입니다. 3개의 연구그룹 역시 빅뱅 이후 우주의 생성 순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계 핵물리학계의 연구주제들을 두루 다루고 있는 것이지요. 1그룹은 우주 탄생 직후 생성된 쿼크-글루온 플라즈마를 연구합니다. 2그룹의 탐색 영역은 쿼크와 글루온이 결합되어 강입자로 변하는 과정인 강입자 핵물리입니다. 3그룹은 자연계에서 사라진 희귀 동위원소의 구조와 압축된 저온 핵물질 특성을 연구하는 핵 구조 및 천체핵물리 분야입니다. 연구센터는 이를 통해 아직까지 인류가 알고 있는 핵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중성자별의 구조를 파헤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해외의 다른 가속기들보다 더 중성자별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라온의 차별성 덕분에 가능한 꿈이기도 합니다.

중이온가속기 라온 조감도

라온은 200MeV/u의 가속에너지, 400kW급의 가속출력으로 현재 운영 중이거나 비슷한 시기에 가동을 시작할 세계의 중이온가속기 중에도 가장 우수한 사양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원자번호 1번 수소부터 92번 우라늄까지 실질적으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원소를 실험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자랑거리입니다. 또한 두 가지 동위원소빔 생성방식을 결합하는 전례 없는 시도로 국제학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동위원소의 생성방식은 크게 ISOL(Isotope Separation On-line)과 IF(In-flight Fragmentation)으로 나뉩니다. 해외의 가속기들은 대개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하지만 라온은 세계 최초로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혹은 따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ISOL에서 일차적으로 추출한 동위원소를 재차 IF에서 가속·충돌시키면 지금까지의 핵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철(Fe) 이후 무거운 원소들의 실체에 접근할 가능성이 더욱 커집니다. 연구센터가 중성자별들의 충돌로 발생했다고 예측하고 있는 무거운 핵반응의 영역이지요.

기초과학 강국의 미래

프랑스 GANIL 연구소를 방문한 연구센터 구성원들

가속기는 쉽게 생각하면 현미경 같은 일종의 관측 장치입니다. 현미경으로 작은 세포를 들여다보는 것은 대상물과 충돌해 반사되는 빛을 시신경이 감지하는 과정입니다. 레이더는 충돌해서 되돌아오는 전자기파로 목표물의 크기와 위치를 식별하지요. 고래나 박쥐라면 초음파가 충돌의 수단이 됩니다. 결국 관측의 본질은 충돌인 셈입니다. 가속기 역시 충돌을 통해 미시세계를 관측하는 것인데요. 이때 중요한 것이 눈의 역할을 하는 ‘검출기’입니다. 연구센터는 출범 이후 지난 2년간 라온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가속기 실험에 활용할 수 있는 첨단 검출기와 주변장치 개발에 주력해 왔습니다.

핵자 당 수천만 전자볼트의 저에너지 중이온 충돌실험에서 파편 핵들의 궤적을 3차원적으로 추적하는 기체검출기, 핵 구조 연구에 필수적인 강력한 시간분해능의 감마선 검출장치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연구센터는 출범 직후 프랑스 GANIL 핵물리연구소의 FAZIA 실험에 참여하며 원자번호 1부터 50번까지 광범위한 범위에서 동위원소를 구분할 수 있는 첨단 실리콘-결정체 융합검출기의 실리콘 센서와 신호처리 전자장치도 개발 중입니다. 이들 모두 라온 실험에서 입자의 종류를 판별하고 에너지를 정밀하게 측정할 검출기들입니다.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는 라온 완성 이후뿐만 아니라 현재 해외 가속기들에서 진행 중인 실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연구센터 소속의 대학원생이 미국 브룩해븐국립연구소(BNL)에서 진행된 RHICf 실험을 통해 운동량이 0에 가까운 영역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양성자의 스핀 비대칭성을 발견했습니다. 이 현상은 기존의 강한상호작용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의 핵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올해 6월 물리학 분야의 최고 학술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실렸습니다. 이와 함께 연구센터는 요즘 눈앞으로 다가온 라온의 완성을 앞두고 대형 핵물리 실험장치인 LAMPS 검출기의 적기 완성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라온의 고에너지 실험동에 설치되는 LAMPS 검출기는 연구센터 참여 연구자들이 라온 구축사업 전에 이미 실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장치 제작에 필요한 중성자 검출기, 전하를 띤 입자의 비행궤적을 추적하는 시간투영검출기(TPC), TPC를 둘러싸는 트리거 섬광검출기 등을 주도적으로 개발해왔습니다. 홍 센터장은 “LAMPS 중성자 검출기의 시간·위치·에너지 분해능은 세계 최고”라며 “중성자 검출기의 신호형태를 이용하여 다중 중성자 사건 분석법을 개발 중인데 이 또한 세계 최초”라고 설명합니다.

LAMPS 중성자 검출기와 전자장비 LAMPS 중성자 검출기의 초기 아이디어

연구센터가 주력하고 있는 것은 비단 연구 인프라 뿐만이 아닙니다. 국내 유일의 핵물리 전문 연구그룹인 만큼 국내 핵물리학계 전반의 연구 문화를 일신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연구센터는 현재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단, 기초과학연구원(IBS)의 라온활용협력센터와 희귀핵 연구단, 중이온가속기이용자협회 등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효율적인 공동연구 모델을 구축하는 데도 열심입니다. 국내 핵물리학계 전체가 자율적이고 탄력적인 주제별 공동연구를 통해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연구센터 참여 연구원뿐만 아니라 이론과 실험에 이르는 국내 관련 연구자 전반이 함께 참여하는 연구회들을 조직하며 소통과 개방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홍 센터장은 “이러한 노력들이 계속해서 뒷받침 된다면 앞으로는 연구센터를 중심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공동연구 실험 그룹이 형성될 것”이라며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 국제 가속기 연구의 주역이 되고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이론을 바탕으로 실험을 설계해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탄생시키는 꿈같은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는데요. 대한민국 기초과학의 상징이 될 중이온가속기 라온과 극한 핵물질 연구센터. 이들의 가속과 충돌이 만들어낼 ‘과학강국 코리아’의 즐거운 미래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한편 한국연구재단은 창의성과 탁월성을 보유한 우수 연구집단 발굴과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핵심연구 분야 육성, 집단연구를 통한 차세대 인재 양성과 젊은 과학자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 제공을 위해 이학(SRC)·공학(ERC)·기초의과학(MRC)·융합(CRC)·지역특화(RLRC) 등 5개 분야에 걸쳐 선도연구센터를 선정·지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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