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호 포커스 人

복합위기 시대의 사회과학
“K-패러다임을 고민할 때”

한국연구재단 윤비 사회과학단장(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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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적인 코로나 사태와 환경위기, 4차산업혁명 기술이 촉발하고 있는 경제구조 재편, 세대·계급·젠더·지역 등의 집단적인 내부갈등까지, 최근 우리 사회가 안팎에서 마주하고 있는 변화의 파고들은 모두 전례가 없던 것들입니다. 또한 이런 동시다발적 위기상황들은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더욱 복잡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치 태풍들이 충돌해 더 큰 파괴력의 퍼펙트스톰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10월 부임한 윤비 신임 사회과학단장의 가장 큰 화두는 이런 ‘복합위기’에 대한 사회과학의 대응입니다.

역사를 통한 현실의 재인식

AI, 의약학, 보건학, 청년, 불평등, 안보…. 윤비 단장의 사무실 한쪽 칠판에는 좀처럼 쉽게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이 빼곡합니다. 다양한 문제들이 난마처럼 뒤얽히고 있는 시대상 속에서 사회과학이 어떻게 돌파구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라는 윤 단장의 머릿속을 엿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Q사회과학단장에 지원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연구재단의 사회과학단장 공모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마침 그간 진행해온 제 정치사상 연구의 한 단락을 마무리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정치사상은 비판적인 반성의 학문입니다. 인간이 모여 거대한 질서를 이루는 정치, 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했던 과거의 역사와 철학이 주된 연구대상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세계를 객관화하고 재인식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세계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상과 실천들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되짚어보며 정치, 경제, 사회제도의 혁신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저 역시 과거의 사상을 연구하면서도 한편으로 동시대의 문제들에 관심이 많던 차에 이 기회를 통해 사회과학의 학문적 발전, 나아가 현실세계의 개선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Q연구재단과 대전이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는 건 어떠세요?

교수라는 직업은 강의시간 외의 연구와 개인적인 업무들이 대부분 정해진 시간 없이 진행됩니다. 연구에 몰두할 때는 낮밤도 자주 바뀌게 되지요. 사실 이런 불규칙한 일상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계속돼 온 것인데 한국연구재단에 와서 30여 년 만에 다시 규칙적인 일과를 보내게 되면서 루틴이 있는 생활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Q연구재단 생활의 행복요소들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소개 부탁드립니다.

독일 유학 시절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학자로서의 단순한 삶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번잡한 한국의 교수 생활과 달리 다른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고 연구에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비록 연구와 직접 관련해서는 아니지만 연구재단 생활은 사고의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독일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톱니바퀴처럼 잘 짜인 업무구조 덕분에 제가 감당해야 할 몫과 책임의 범위가 분명하고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도 드뭅니다. 넉넉한 자연을 벗 삼아 숙소와 일터를 도보로 오갈 수 있는 여건도 좋습니다. 서울과 같은 출퇴근 스트레스가 없고 온전히 제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니까요. 그만큼 새로 맡은 사회과학단장의 고유 임무와 역할에 대해 더 멀리까지 계획하고 전망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복합위기의 시대

청소년 시절 역사, 문학, 철학, 예술 등에 관심이 많았던 윤 단장은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하며 정치사상 공부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과거의 정치사상과 사회이론을 읽고 이해하는 가운데서 얻게 되는 인간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현대적인 연구중심대학의 효시이자 다학제적 풍토로 유명한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서양정치사상을 전공하고 2010년 귀국해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 핀란드 등 다양한 나라의 연구기관들에 체류하거나 강연, 프로젝트 등을 통해 교류하면서 학문적 시야를 넓혀 왔습니다.

Q단장님께서 진단하고 계시는 현 시대의 ‘복합위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먼저 안보(安保)라는 단어의 뜻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안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남북한 대치 상황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말의 영어단어인 ‘security’는 그 어원이 보다 광의적입니다. ‘편안히 보전함’ 즉 모든 국민이 근심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조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처럼 사회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위기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국민을 보호하는 안보의 기능 역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어느 한 분야의 능력과 전문성만으로는 풀기 힘든 복합적인 영역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Q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주신다면?

예를 들어 최근의 코로나 사태나 일련의 아동학대 사건,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온 나라를 슬픔에 빠지게 했던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순히 보건의료와 사회복지, 안전관리 등에서 표면에 드러난 문제들을 수습하는 식의 일차원적 접근만으로는 문제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는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위기상황 중에서도 우리나라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 불평등과 세대갈등입니다.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화해온 서구세계와 달리 초고속 압축 성장을 거듭한 우리 사회는 전쟁과 빈곤을 경험한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한국을 선진국으로 알고 자란 세대까지 삶의 배경과 가치관이 전혀 다른 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순히 분배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여러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그동안 해온 것처럼 우리보다 앞서간 다른 선진국의 제도와 규범을 빌려 쓰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원만한 조율과 합의가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이르렀다고 여겨집니다.

Q이런 복합위기의 시대에 사회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간 우리 학계는 선진적인 사회이론을 수용해 한국사회에 이식하는 데서 많은 성과들을 낳았습니다. 서구세계의 지혜와 경험을 변용해 경제와 사회, 문화 전반의 고속성장에 효율적인 사회제도와 준거의 틀을 제시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사고방식과 학문적 경향으로는 더 이상 현재와 미래의 사회현상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국이 세계의 모범이 될 수가 있음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만든 ‘K-방역’의 성공사례처럼 외국을 답습하던 데서 나아가 이제 우리 사회의 고유함을 담아낼 수 있는,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사회과학 패러다임을 고민할 때가 된 것입니다.

통합과 균형의 패러다임

윤 단장이 ‘K-패러다임’으로 표현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과학 패러다임은 ‘통합’과 ‘균형’의 두 기둥 위에서 기획되고 있습니다. 다학제적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광범위한 지식의 통합, 그리고 성과지향적인 양적 연구와 미래지향적인 질적 연구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이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상은 사회과학의 새로운 임무와 역할을 견인하는 동시에 장기적인 학문 발전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합니다.

Q2년은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기에는 짧은 시간입니다. 임기 동안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다는 것은 사회과학계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 분야의 이해와 공조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또한 정책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연구재단과 정부부처까지 더 많은 단계의 절차와 합의가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합위기와 포괄적 패러다임의 개념을 세우고 인식을 확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임 직후부터 사회과학을 비롯해 보건, 의학, 심리,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다학제적인 복합위기 대응체계의 중요성을 설파할 수 있는 이슈리포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년의 임기는 문제제기만으로도 빠듯한 시간이긴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머지않아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가시화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Q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번 코로나 사태 속에서 어찌 보면 가장 종합적이고 대중적인 위기대응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었던 학문 분야는 사회과학입니다. 하지만 방역 일선을 담당한 자연과학, 팬데믹에 대한 대중적 지식과 담론을 생산하는 데 기여한 인문학 등과 비교해보자면 활약이 기대에 못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이 원인을 철저히 밝히는 것이 사회과학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연구자의 일원인 만큼 이런 미진한 활약에 대해 아쉬움이 큽니다. 또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산을 촉진할 수 있는 연구정책 마련을 위해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일선의 더 많은 이해와 관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어떤 의견이나 생각도 가감 없이 전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Q끝으로 연구재단 구성원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러 국가들의 연구현장을 직접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더 한국연구재단이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짧은 시간 내에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선진적이고 짜임새 있는 연구지원체계를 구축해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의아한 부분도 있습니다. 연구재단이 일선 연구현장에 미치는 파급력은 이곳에서 상상하는 이상으로 큽니다. 최근 선정이 마무리된 BK21+ 사업에서 연구자들의 저서에 대한 평가를 상향하려는 움직임이 논문만 중시해온 일선 대학의 분위기를 크게 바꿔버린 것이 그 한 예입니다. 연구재단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큰 변화의 계기가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구재단이 갖는 이런 의미와 중요성을 정작 내부 구성원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작은 날갯짓 하나가 폭풍을 일으키는 나비효과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연구재단의 작은 결정도 일선의 연구자들, 나아가 대한민국 학문발전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재단의 구성원들이 높은 수준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bout the interview

윤비 사회과학단장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초청으로 독일에 유학,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대학의 정치학과와 역사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과 서양 중세 및 르네상스사를 강의했으며 독일연구재단(DFG) 후원 특별연구센터(SFB 640)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2010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한겨레신문 등 국내외 신문에 정치이론과 인간의 상징행위를 다루는 도상학 등을 주제로 다양한 글을 기고해왔다. 작년 12월에는 도상학을 주제로 EBS의 교양강연프로그램 ‘지식의 기쁨’에 출연하여 5회 동안 강연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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