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호 생생 연구현장

유라시아를 향한
新실크로드 대장정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
경희대학교 부설 한국 고대사·고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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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균,쇠>는 유라시아의 문명이 다른 대륙을 압도하게 된 원인을 ‘지리적 개방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랄산맥이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구별하지만 해양과 사막 등의 뚜렷한 경계가 없는 유라시아는 사실상 하나의 대륙입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달리 동서로 연결된 지형도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위도와 기후의 차이가 적어 사람과 가축, 농작물의 이동과 적응이 쉬웠고, 고대부터 개척된 실크로드는 끊임없이 동서양의 문물을 실어 나르며 문명의 전파와 확산을 가속화합니다. 한반도 역시 이런 거대한 유라시아 네트워크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유라시아로 확장되는 한국 고대사

“하지만 남북 분단 이후 유라시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선뜻 감이 오지 않는 생소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국내 일부의 과장된 고대사 인식과 함께 동북공정, 일대일로 등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신중화주의에 대해 경계심이 높아지며 유라시아 지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학문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없고 박사급 연구자도 드문 소수학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인욱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소장)

경희대학교 부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는 태생 자체부터가 이런 비이성적이고 패권주의적인 역사인식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는 지난 2014년 한국연구재단의 중점연구소 사업을 기반으로 고대 한국과 유라시아 대륙의 네트워크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고조선과 북방문화의 관련성을 연구하며 한국 고대사의 시야를 확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내의 분위기도 차츰 변화해갔습니다. 한국의 국력상승과 함께 그간 소홀했던 유라시아 지역의 경제·문화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우리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창출하기 위한 정부 정책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신북방정책 등이 이어지며 전력, 철도, 가스, 항만, 조선, 북극항로, 수산, 농업 등으로 협력분야가 빠르게 확대되었습니다. 한국연구재단 역시 이 같은 국가적 노력에 발맞춰 2019년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을 통해 유라시아 역사·문화 연구와 전문가 육성의 거점기관으로 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를 선정하게 됩니다.

고조선의 네트워크 국제학술대회

고고학 기반의 과학적 접근

강인욱 소장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가 최근 일련의 대북방 정책기조 속에 크게 늘어난 관련 연구소들과의 경쟁에서 유라시아 지역연구의 전략거점으로 최종 낙점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바로 ‘전문성’과 ‘새로운 지평’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일찍이 국내에서 희소하기 그지없는 북방 유라시아 언어와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국-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연구 역량을 닦아 왔습니다. 특히 생물고고학 등의 도입으로 기존의 문헌 위주나 유물 비교 연구에서 탈피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관계성의 실체를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과 한국 고대사의 네트워크 학술대회
외교부를 대상으로 개최한 신북방정책 연구설명회 연구총서

고고학은 과거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사회, 이념 등을 복원하고 변화의 이유와 원인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생물고고학은 그 가운데서도 고고학 현장에서 발견되는 사람과 동식물의 유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과거의 세계를 탐구하는 첨단 학문입니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는 말, 개, 소 등의 반려·목축동물과 국수 같은 음식문화의 이동 과정과 경로를 추적하며 한반도와 실크로드, 유라시아를 잇는 고대사 연구에 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 연구진들은 국가적인 유라시아 역사문화 연구의 당위성과 사회적 담론 제시에도 힘을 쓰고 있는데요. 이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국내외 소통창구가 모두 막히게 된 상황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순수 학문성과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중강연과 좌담회 등으로 콘텐츠의 폭을 확대했으며, 줌 등의 온라인 비대면 회의도구를 적극 도입함에 따라 해외 학자들과도 더 쉽고 빈번하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

고대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과 연해주 학술대회

힘과 무력이 지배했던 과거와 달리 21세기의 국가 관계에서는 역사·문화적 유대감이 파트너십의 중요한 지렛대입니다. 국내에서 유라시아는 최근까지도 막연하게 구소련으로 통칭되었을 만큼 생소한 지역입니다. 현재는 다양한 국가들로 독립해 우리나라와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만큼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감대 형성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는 특히 실크로드 상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고대 유물을 국가의 상징(國章)으로 삼은 카자흐스탄처럼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이 높은 만큼 ‘고대 한국-유라시아 네트워크와 신실크로드 정립’을 목표로 한 연구활동과 국제적인 학술교류가 향후 신북방정책의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강인욱 소장은 “유라시아 지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과거 문명교류사 속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현재의 경제적·정치적 접근은 금세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신북방정책이 성공하려면 역사·문화적 관련성의 회복을 시작으로 궁극적으로는 공존공영의 유라시아 문화교류 벨트를 완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는 다른 연구소가 쉽게 할 수 없는 새로운 주제개발과 다양한 학문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고 보이지 않지만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비타민처럼 유라시아 고대 네트워크라는 인류문명의 큰 역사 속에서 한국 고대사의 가치를 밝히고, 또 그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국제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 같은 구상 아래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는 현재 6년간의 단계별 목표에 따라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연구와 교류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1단계에서는 연해주와 만주, 몽골·흉노 제국과 시베리아를, 2단계에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중앙아시아와 터키 등지의 투르크 문화권까지 실크로드를 통해 이어졌던 고대 한국과 유라시아 네트워크 전반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발굴해나갈 계획입니다.

연구 사업의 단계별 내용과 대상 지역

한편 한국연구재단은 순수 학문연구 진흥과 함께 인문사회 연구의 사회적 기여 확대를 위해 2019년 74개의 인문사회연구소를 신규 선정했습니다. 특히 이들 새로 선정된 인문사회연구소는 박사급 학문후속세대들의 안정적인 연구 거점으로 작용하며 복잡 다양한 국가사회적 주제에 대해 보다 거시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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