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구재단 이희윤 기초연구본부장(KAIST 화학과 교수)
최근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뚜렷한 새 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상황을 더욱 엄중하게 할 뿐, 당장의 지표개선은 물론 중장기적인 체질개선이 함께 고민되어야 할 시기라는 게 각계의 중론입니다. 이에 따라 더욱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분야가 다름 아닌 미래지향적인 국가 연구개발 시스템입니다.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순망치한(
脣亡齒寒)의 뜻처럼 한 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9년 본격화될 ‘연구자 중심’의 새로운 R&D 패러다임을 향한 대항해에 앞서 한국연구재단 웹진은 가장 먼저 기초·응용 분야 연구개발 사업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이희윤 기초연구본부장을 찾았습니다. 선임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비상한 시기, 중책을 맡게 된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국가 연구개발의 새 패러다임…연구자 중심 R&D”
이제는 연구비를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역할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연구자들이 스스로 방향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연구재단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 만큼 우리 스스로도 국가 연구개발을 이끄는
항해사이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엔진을 돌리는 기관장이란
자긍심이 더없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2019년은 전에 없이 새로운 연구 환경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 이희윤 본부장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연구재단과 연구자가 서로에 대한 믿음 아래 자율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생태계를 조성해가는 ‘연구자 중심 R&D’의 원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지원은 다른 나라 과학기술인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국제금융위기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확대된 R&D 투자는 작년 기준 19.6조 원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전체 국가예산의 4.56%로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으로 따지면 세계 1위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2019년은 자기주도적인 연구 생태계 조성 원년”
연구자 중심 R&D는 표현만 다를 뿐 그간 학계와 정부 모두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온 사안입니다.
연구재단 역시 이미 상당 기간 연구자 중심의 지원체계 혁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연구자 제안방식의 기초연구 투자 확대, 질 중심의 평가제도 강화, 장기연구 확대,
신진연구자 지원강화, R&D 서식 간소화 등이 그런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KAIST 화학과 교수로 오랜 시간 연구현장을 지켜온 그는 “우리나라도 어느새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40여 년의 역사를 갖게 됐다”면서 “큰 기대와 함께 여전히 우려도 존재하지만, 이제는 연구자들이 외부의 관리나 감시 없이 스스로 자신의 연구를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고 믿는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스스로 연구 생태계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전보다 확연히 잦은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다른 분야끼리도 어떻게 하면
연구를 잘할 수 있을지 활발히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무관심했던 예전과 달리 융합의 기운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연구재단은 그렇게 연구자들이 구축하려는
자율적인 생태계에
멍석을 깔아주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희윤 본부장이 이끌고 있는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본부는 기초·원천연구부터 응용연구까지 우리나라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기초분야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조직입니다. 자연과학단, 생명과학단, 의약학단, 공학단과 함께 ICT·융합연구단이 풀뿌리 기초연구부터 리더연구 및 집단연구까지 거의 전반에 걸쳐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이끌어 가게 될 이 본부장의 부담감 역시 클 듯합니다. 그는 “전임자들과 60여 명의 본부 구성원들이 이미 훌륭하게 닦아 놓은 기반이 있어 저는 그 일관성만 잘 유지하면 되는 행복한 상황”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변화를 주도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2년의 임기가 결코 짧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이광복 전 본부장님이 해온 일들을 파악하며 그런 확신이 더 강해졌지요. 또 다섯 분의 유능한 전문가 단장님들이 계시니 두렵다거나 걱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저는 그림의 큰 틀을 유지하고 균형을 잡는 역할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평가 어려워도 연습 없이는 안 늘어”
향후 2년간 연구자 중심 R&D라는 새로운 목적지로 기초연구본부를 이끌어 가게 될 이 본부장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의 대답은 앞서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게 간결하고 명료할 따름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 연구하는 이들의 아이디어를 존중하겠다”라는 것입니다. 연구자와 기초연구본부 구성원들이란 주인공들이 스스로 창의력과 전문성을 빛낼 수 있도록 묵묵히 매니저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요즘 그는 스치듯 만나는 사람, 우연히 마주치는 글귀에서도 종종 큰 영감을 얻곤 한다는데요. 5년여 만에 다시 읽은 ‘틀리지 않는 법(How not to be wrong)’이란 책도 그 중 하나입니다.
수학과 통계에 관한 책인데 젊어서는 보이지 않던 교훈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자칫 숫자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문제를 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에서 전투기 손실을 막기 위해
작전에서 돌아온 비행기들이 주로 총탄을 맞는 곳을 살펴보며 보강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격추되어 돌아오지 못한 비행기들이 어땠을지는 생각을 못했지요.
IF(임팩트 펙터) 지수나 유명저널로 연구성과의 경중을 따지는 것 역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외국 학계도 마찬가지인데 다른 점이라면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그 의미를 정성적으로 분석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이 본부장은 “아직 우리에게 정성평가가 익숙지 않아 어렵다”면서 “하지만 힘들더라도 노력과 연습 없이는 늘지 않는다”라고 강조합니다. 기초연구본부 역시 연구자 중심 R&D가 본격화되는 2019년에는 연구계획서와 보고서, 결과 심사단계를 대폭 간소화하는 한편, 연구자의 성실성을 제대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제반 사항들을 정비 중입니다.
“평가자가 더욱 깊이 있게 연구자를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도 올해의 중요한 계획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를 위해 미국 국립과학재단(NSF)과 국립보건원(NIH)의 사례들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생애 첫 연구비 등을 지원받는 신진 연구자들이 어떻게 하면 연구비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실험실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는지 등을 교육하는 프로그램도 구상 중입니다.
학문 분야별로 최적화된 규모의 연구비 지원을 위한 분석연구도 시작하고 있습니다.”
큰 변화의 파고를 맞는 기초연구본부로서는 아무래도 바쁜 한 해가 될 듯합니다. 자유로운 연구자 신분에서 과학기술계 전반의 성장을 살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이 본부장 역시 인생에서 더없이 분주할 시간들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교수 시절과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을 묻는 질문에 ‘공인의 책임감’을 첫 손가락에 꼽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립니다.
“지난 3개월 간 다양한 분야와 지역의 연구현장을 이해하고, 또 우리 연구재단의 역할을 홍보하기 위해 만난 분이 200명이 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잘 몰랐던 세상을 만나는 게 축복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제 한 사람의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기초연구 전 분야를 고민해야 하는 만큼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신중해야 하는 것은 고충 아닌 고충입니다. 하지만 제 노력이 밀알이 되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자기주도적 연구환경을 정착할 수 있다면 기꺼이 헌신해야지요.”
혁신(革新)의 사전적 정의는 ‘묵은 관습과 방법을 완전히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새 살을 돋게 한다는 원래의 뜻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의 인고가 필요한 일인지 더 실감이 납니다. 어려운 시기, 얼어붙은 빙하를 깨고 더 힘차게 항해하는 ‘연구자 중심 R&D’가 2019년 국민과 연구자들과 함께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