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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R

세상에 없던 반도체의 등장,
계산과 기억의 경계를 허물다
연세대학교 심우영 교수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상 수상자의 연구 여정을 돌아보며, 그 속에서 탄생한 주요 성과와 과학기술이 열어갈 미래를 그려봅니다.

똑똑한 AI는 때때로 ‘전기 먹는 하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이 마주한 가장 현실적인 과제 중 하나이기도 하죠.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만큼 이를 얼마나 적은 에너지로 구현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는데요. 어쩌면 해답은 기존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반도체 소재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4월호 스토리R에서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구조의 반도체를 제안하며 저전력 AI 반도체의 가능성을 넓힌 심우영 교수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상 우수한 연구개발 성과로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 연구개발자를
매월 1명 선정하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과 상금 1천만 원을 수여하는 상

Chapter 01 인물탐구

심우영1977년 소속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주요학력
  • 2007.09. ~ 2012.09.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재료과학·공학 박사
  • 2004.03. ~ 2006.08.
    연세대학교 금속공학 석사
  • 1996.03. ~ 2004.08.
    연세대학교 금속공학 학사

Chapter 02 오래된 이론에서 찾은 새로움

심우영 교수는 일찍이 나노 소재와 반도체에 매료되어 연구를 시작했는데요. 그가 나노 소재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작은 세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물성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것. 물질이 아주 얇아지거나 작아지면 기존에 없던 성질이 나타나는 점에서 큰 흥미를 느꼈다고 하는데요. 교과서에서 배운 물질의 성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발걸음을 주저 없이 연구실로 이끌게 했죠.

박사학위 최종학위심사 발표를 마치고 지도교수 및 그룹원들과 축하파티를 진행하는 모습(2012. 09.)

특히 그가 눈길은 둔 것은 반도체 소재. 과거 학부 시절 배웠던 폴링(Pauling)의 법칙을 떠올리게 됩니다. 폴링의 법칙은 원자들이 결정구조 안에서 어떻게 배치될 때 가장 안정적인지를 설명하는 화학 이론인데요. 그중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네 번째 법칙을 반도체 설계에 접목합니다. 이미 폴링의 법칙은 배터리 양극재 소재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반도체 소재에 적용해 새로운 반도체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시작한 연구는 마침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개념 반도체 구조를 탄생시켰습니다.

Chapter 03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반도체 등장

반도체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 속은 매우 촘촘합니다. 이 통로에서 전기를 나르는 전자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전자보다 큰 이온이 움직일 공간은 턱없이 부족한데요. 정확히 얘기하자면 반도체 소재 안에서 이온이 움직인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반도체의 기능은 뛰어나지만, 이온이 수행하는 기억 기능을 동시에 구현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III-V 반도체 구조에 의문을 품은 심 교수는 획기적인 반도체 설계 개념을 제안하기에 이르죠.

  • III-V 반도체 주기율표의 3족 원소와 5족 원소를 결합해 만든 화합물 반도체.
    서로 다른 성질의 원소를 조합해 물리적·전기적 특성을 목적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

그가 새롭게 제시한 결정구조는 양이온 유택시(cation-eutaxy) 구조. 층과 층 사이에 반데르발스(van der Waals) 간격, 즉 물리적인 틈이 있어 공간을 따라 이온이 이동할 수 있는데요. 이렇게 이온이 이동하면서 전류의 흐름을 바꿔 기억 기능이 생깁니다. 기존 반도체와 달리 전자와 이온이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구조로, 연산과 기억을 한 소자에서 가능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해내는 혁신적인 반도체 구조의 탄생 과정은 이러합니다. 심 교수 연구팀은 반도체 구조를 개발하기 위해 계산 기반 물질 탐색을 활용, 44종의 후보 물질을 발굴했는데요. 계산과학을 통해 온도, 반응 시간, 화학 조건 같은 요소를 수차례 바꿔가는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해요. 이어 구조가 무너지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도록 일부 원소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토포케미컬 에칭(Topochemical Etching)’ 방식을 택했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온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상적인 2차원 반도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일부 양이온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그런데 남아 있는 양이온이 전기장에 의해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더라고요. 늘 그렇듯 연구는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는데, 그럴 때 방향성을 잘 잡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새로운 III-V 반도체 소재

이번에 개발한 양이온 유택시 구조 반도체 소재가 특별한 이유는 전기적 특성과 메모리 기능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소재에서 기억과 연산 기능을 동시 수행할 수 있는 컴퓨트-인-메모리 방식(Compute-in-Memory)은 인공지능 연산에 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계산을 해야 하는 차세대 인공지능 반도체 기반 기술로 주목받고 있죠. 나아가 인간의 뇌 신경망처럼 신호의 세기와 시간에 따라 연결 강도가 변화하는 신경 접합부(시냅스) 동작을 모사할 수 있어 신경망 모방(뉴로모픽) 인공지능 소자로서의 활용성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뉴로모픽 및 컴퓨트-인-메모리(CIM) 소자 개념 제시

심 교수의 연구는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처음으로 소재를 제안한 일명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연구’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학계에서 학문적 혁신성과 실용적 응용 가능성을 인정받아 2024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터리얼스(Nature Materials)에 게재되는가 하면, 10월호 ‘이달의 연구 브리핑 논문(Research briefing)’으로도 선정되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먼저 길을 만드는 연구를 하는 문화가 중요합니다. 새로운 소재를 제안하는 연구는 실패 가능성도 크지만, 도전적인 연구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나라가 반도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소재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Chapter 04 1년 363일, 연구실에서 보내는 중

심 교수가 넓혀온 과학의 가능성은 학생들의 성장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설날과 추석 당일을 제외하고 1년에 363일을 연구실에서 보내는 그는 연구 성과를 쌓는 일만큼이나 사람을 키우는 일에도 깊은 정성을 쏟아왔는데요. 수업 준비에 많은 공을 들이고, 실제 연구에서 얻은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고자 한 그의 진심에 학생들은 ‘우수강의 교수상’으로 답했습니다. “사실 수업을 잘 못합니다. 학기 초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학생들에게 ‘아직도 이 과목을 잘 모른다’라고 먼저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래서 수업을 준비할 때마다 제가 이 내용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다시 질문해 보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설명하려면 결국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우영 교수의 실제 수업 장면

모든 수업은 판서를 해서 학생들이 수업을 따라올 수 있게 한다.
언제든 학생들이 복습할 수 있도록 모든 수업을 녹화해 학생들에게 제공 중이다.

심우영 교수의 학창 시절, 지도교수님에게서 들은 한마디는 그의 마음을 깊게 울렸습니다. ‘좋은 스승이 늘 좋은 학생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학생은 반드시 좋은 스승을 만든다’라는 이야기였죠. 그래서일까요. 심 교수는 학생들을 이끄는 동시에 학생들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가 만들어가는 연구실의 진짜 성과는 논문 너머, 사람의 성장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습니다.

한림원 인터아카데미 심포지엄 직후 학생들과 찍은 사진(26. 03. 27.)

그는 연구를 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태도로 ‘몰입’을 꼽습니다. 꾸준히 파고들고, 끝까지 질문을 놓지 않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성과에 닿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없던 반도체 소재를 제안한 이번 연구도 그러한 시간의 축적 위에서 탄생했을 테죠. 앞으로 그가 또 어떤 주제에 몰입해 새로운 연구의 문을 열어갈지 기대됩니다.

속닥속닥! 못 다한 이야기 연구자 TMI

  •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상을 받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상은 개인의 성과라기보다는 함께 연구해 온 학생들과 동료 연구자들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가라는 격려를 받은 것 같아 책임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연구진이 전 세계 반도체 소재 연구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가 새로운 소재 연구를 선도할 수 있도록 꾸준히 도전적인 연구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 이번 연구 성과가 향후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 기대하시나요? 이번 연구는 완전히 새로운 반도체 소재를 처음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연구가 많아질수록 우리나라가 세계 반도체 연구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먼저 길을 만드는 연구를 하는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소재를 제안하는 연구는 실패 가능성도 크지만, 이런 도전적인 연구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나라가 반도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소재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연구문화가 자리 잡는 것이 앞으로의 반도체 경쟁력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 소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교수님의 연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뇌의 뉴런이 작동하는 원리를 소재와 소자로 구현하는 것입니다. 뉴런은 나트륨 이온이 이동하면서 전기 신호를 만들고, 그 신호로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저희 연구도 이 원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금물 속 나트륨 이온이 움직이면서 전기를 만들고, 그 전력을 이용해 반도체의 기억 기능과 금속 스위치의 빠른 계산 기능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것인데요. 쉽게 말해 소금물을 부으면 스스로 전기를 만들고 기억과 계산을 하는 전자소자를 만드는 개념입니다. 기존의 뉴로모픽 연구가 뇌를 흉내 내는 데 집중했다면, 이온의 실제 움직임을 이용해 작동하는 새로운 계산 방식을 제안합니다. 공상과학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결국 로봇이 소금물만 공급받으면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저희가 그리고 있는 미래입니다.
  • 앞으로 집중하고 싶은 연구주제나 꼭 이루고 싶은 인생의 프로젝트가 있나요? 전 세계 학생들이 우리나라로 와서 연구를 배우고 싶어 하는 연구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신소재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연구의 중심이 되길 바랍니다. 해외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모여들고, 우리 연구에서 배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다시 세계로 퍼져 나가는 그런 연구 생태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결국 소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 문화를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소망입니다.
  • 과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격려와 조언 한마디. 인간은 기본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욕구가 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인간을 발전하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인간의 본성과 아주 잘 맞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단순히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과정입니다. 작은 호기심 하나가 큰 발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도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냥 넘기지 말고 끝까지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호기심이 결국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출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