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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의 서재

시대를 휘몰아친 문학을 찾는 당신께
「광장의 문학」
김진영 前 연세대학교 교수

한 권의 책에 담긴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 활자 속 유영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는 일상에 전환점이 되곤 하는데요. 사유(思惟)의 서재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으로 탄생한 우수학술저서 한 권과 저자 인터뷰,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질문거리를 곁들여 전합니다. 책 너머의 저자, 저자 너머의 빛나는 사유가 담긴 서재에 들어오세요!

문학은 개인의 고요한 서재를 넘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사회가 나아갈 길을 묻는 논쟁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러시아문학 속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영감을, 때로는 삶을 버티게 하는 인문학적 성찰을 발견해 오곤 했는데요. 김진영 교수는 「광장의 문학: 격변기 한국이 읽은 러시아, 해방에서 개방까지」를 통해 우리 사회가 러시아문학을 어떻게 수용하고 소비해 왔는지 역동적인 여정을 추적합니다. 이번 사유(思惟)의 서재에서는 밀실을 넘어, 광장으로 존재했던 문학의 발자취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김진영 前 연세대학교 교수

미국 휘튼칼리지 러시아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 슬라브어문학과에서 푸시킨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1년부터 2025년까지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저서로 『푸시킨: 러시아 낭만주의를 읽는 열 가지 방법』, 『시베리아의 향수: 근대 한국과 러시아문학, 1896~1946』, 『광장의 문학: 격변기 한국이 읽은 러시아, 개방에서 해방까지』, 『자작나무 숲: 러시아문학과 한국 그리고 나』, 『코레야 1903년 가을: 세로셰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예브게니 오네긴』, 『땅 위의 돌들」(러시아 현대시 선집)』 등을 쓰고 번역했다.

#01 책을 쓰다 ‘러시아문학’이라는 거울이 비춘 한국

  • 김진영 교수님 반갑습니다. 한국연구재단 웹진 독자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김진영입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체제가 막을 내린 1991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때부터 2025년까지 연세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을 가르쳤습니다. 35년의 교직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정년 퇴임한 지금은 대학이라는 제도 밖에서 러시아학 연구·교육의 제2막을 준비 중입니다.
  • 「광장의 문학: 격변기 한국이 읽은 러시아, 해방에서 개방까지」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러시아문학을 어떻게 수용하고 소비했는지 발자취를 추적합니다. 방대한 기록을 정리하게 된 특별한 집필 동기가 있으신가요? 한국에서 외국학을 공부하다 보면 외국, 특히 서구의 관점에 기대어 사고하게 됩니다. 비단 외국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 그런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꼈어요. 러시아나 영미권의 연구 흐름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저만의 사고와 언어로 ‘나의 러시아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고민은 자연스럽게 ‘우리(한국)의 러시아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정말이지 밀접하고, 러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심상 또한 복잡합니다. '루소포비아(Russophobia)', 즉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애정 즉 '루소필리아(Russophilia)'가 공존하는데요, 두 가지 양상이 어떻게 한국 문화에 반영되어 왔는지를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한마디로 분단 이후 지워졌던 러시아의 흔적을 복원하는 작업이었습니다.
  • 본 저서는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 지원을 통해 출간되었는데요. 출간까지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광장의 문학』 전편에 해당하는 『시베리아의 향수』 역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집필했습니다. 두 권의 책을 통해 한–러 관계 100년사를 정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관련 주제의 수업 개설과 연구 지원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꼭 필요했는데요. 수업은 자료를 정리해 맥락을 구성하게 만들고, 지원사업은 마감을 향한 명확한 책임 의식 속에 작업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지원서를 쓰는 과정 자체가 제게 큰 자극이 됩니다. 연구를 이전보다 더 넓은 스케일과 새로운 방향에서 바라보게 되고, 평가자와 독자의 시선에서 ‘이 연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객관적으로 고민하게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지원사업은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사고의 틀을 확장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 집필을 위해 방대한 양의 국내외 자료를 검토, 러시아문학을 번역하고 읽었던 지식인들을 직접 인터뷰하셨습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발견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 연구의 묘미는, 문헌만으로는 담기지 않는 시대의 결을 직접 경험한 이들의 목소리로 복원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번 작업에서도 1980년대 청년 지식인 사회의 러시아문학 수용 과정을 추적하며 여러 인물을 인터뷰했는데요.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당시 사회적 금기로 여겨졌던 러시아문학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소개했던 출판사 사장님이었습니다. 당시 청년 번역가들을 모아 치열하게 책을 출간했던 이야기부터, 책은 엄청나게 팔렸지만 수익은 술값으로 다 써버렸다는 후일담까지 들려주셨죠. 회고 속에서 그 시절의 공기와 열기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출신으로 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참여했던 이강은 교수와 이병훈 교수의 회고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러시아문학사 개설』을 집필했던 일을 두고 두 분은 지금 생각하면 꽤 대담한 작업이었다며 웃으셨는데요. 그 말에는 치기 어린 열정에 대한 수줍음과, 그 시대를 통과해 냈다는 자부심이 함께 묻어 있었습니다. 더불어 당시 문화의 영향을 받은 90년대 초반 대학생들, 지금은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는 제자들에게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고 집단적인 감동을 공유했다는 그들의 경험은 시대적 분위기와 문학 수용 방식이 얼마나 긴밀히 맞물려 있는지 실감하게 했습니다.

#02 책을 읽다 우리를 매료시킨 러시아문학

  • 「광장의 문학: 현대 한국과 러시아문학, 해방에서 개방까지」는 해방기부터 최근 톨스토이 열풍까지 80년의 시간을 관통합니다. 독자들이 책의 흐름을 어떻게 따라가면 좋을지 핵심 맥락을 짚어주세요. 앞서 말씀드렸듯 『광장의 문학』은 『시베리아의 향수』의 후속편으로, 해방기부터 개방기 이후까지의 한–러 관계와 러시아문학 수용 역사를 잇는 책입니다. 두 권을 함께 읽으면 100년이 넘는 한–러 관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요. 특히 이 책은 한국 지식인들이 러시아문학을 단순한 ‘외국 문학’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와 현실을 어떻게 겹쳐 읽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러시아문학 수용은 한국사의 변천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이에요. 식민지 시대, 해방기, 전쟁기, 분단기, 민주화 시기, 개방기까지 시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품들이 있거든요. 그 맥락을 바탕으로 읽으면 더 흥미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 『시베리아의 향수
      : 근대 한국과 러시아문학, 1896-1946』

      한-러 관계가
      시작된 조선 말기
      ~ 해방 직후(1946년)

    • 『광장의 문학
      : 현대 한국과 러시아문학, 해방에서 개방까지』

      해방기 ~ 개방기 이후

  • 수십 년을 일관된 흐름으로 꿰어내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집필 과정에서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던 교수님만의 ‘원칙(관점)’이 있으셨을까요? 오랜 시간 연구를 하다 보니 문학은 결국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이 명확해지더라고요.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러시아문학이더라도 한국에서 읽힌 방식은 일본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런 점을 포착한 뒤 해당 지점에 끝까지 물음표를 놓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외국 문학 연구가 단순히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자국 사회 문화와의 연결점을 찾아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연구의 지평이 넓어진다고 믿습니다. 즉 외국학이 결국 한국학과 통하는 것이죠. 아울러 1차 자료를 직접 확인하는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당시의 문헌과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며 사실관계를 검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후속 연구가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돌이켜보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역시 1차 자료를 차분히 짚어가며 정리한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러시아문학가를 꼽으신다면 누구일까요? 이유도 함께 알려주세요.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 톨스토이, 전문가적 영향력 면에서는 도스토옙스키 아닐까요. 이광수를 ‘조선의 톨스토이’, 염상섭을 ‘조선의 도스토옙스키’라 불렀다는 사실만 봐도, 이들이 한국 문학과 지식사회에서 얼마나 강력한 참조점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특히 톨스토이의 『부활』은 최남선, 이광수 등 근대 청년 지식인들이 열광적으로 읽었던 작품으로, 봉건 조선에 대한 비판의식은 물론 자유연애, 신분 계층, 사회제도 같은 근대적 가치들을 사유하게 만든 일종의 교과서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1920년대 이후에는 도스토옙스키가 부상하며, 비판적 리얼리즘과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지식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작가라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어야 한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을 정도였지요. 여기에 고리키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인간 존엄의 문제, 이후 현대에 와서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혁명문학으로 읽히며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문학은 시대적 맥락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 한국 독자들이 톨스토이에게 다시 열광하는 현상을 분석하셨습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우리 사회가 러시아문학을 소비하는 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문화 파급 효과를 가진 매체가 너무도 다양해요. 책을 읽기 전 영화, 뮤지컬, SNS 등 여러 방식으로 문학을 소비하게 된 거죠. 아마도 TV 토크쇼(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뮤지컬(안나 카레니나), 영화(리빙: 어떤 인생) 같은 콘텐츠가 없었더라면, 톨스토이 붐은 일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만약 이런 문화적 확산 장치가 없었다면 과거 이광수를 비롯한 초기 문학가들의 톨스토이 예찬이나 2000년대 초 도덕적 단편집 유행 정도에서 흐름이 제한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근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같은 작품이 다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기도 했거든요. 이제 문학은 텍스트 단독으로 홀로 존재하기보다, 문학 바깥의 다양한 매체와 연결되며 확장되는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 본 저서를 보면 러시아문학이 서재에 꽂힌 ‘책’에 머물지 않고 연극, 여행, 낭송, 정치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문학이 우리 삶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라 보시나요? 무한대라고 생각해요. 모든 예술 활동이 그렇겠지만, 문학 역시 그 영향 범위를 특정 영역으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0세기 초의 ‘총체적 예술’ 개념이 이제는 ‘총체적 삶-예술’의 단계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문학은 언어 예술이라는 점에서 여타 예술보다도 직접적으로 일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떻게 쓰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사실상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문학은 단순히 텍스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03 책을 건네다 서재를 떠나 다시 광장으로

  • 교수님께서 「광장의 문학: 현대 한국과 러시아문학, 해방에서 개방까지」를 통해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러시아문학이 한국의 근현대사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외국문학이면서도 한국 사회의 변곡점마다 중요한 참고점이자 하나의 ‘거울’ 역할을 해온 사례는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문학을 읽고, 번역하고, 전파해 온 일련의 과정 자체가 곧 20세기 한국의 사회문화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문학 연구자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롭게 읽힐 책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마음속에 두었던 독자층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염두에 두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존경해 온 선생님들이나 동료 연구자들처럼, 제 글을 엄격하게 읽어줄 분들이지요. 자연스럽게 그분들의 눈높이를 의식하게 되고, 엉터리로 쓰면 안 되겠다는 긴장감도 생깁니다. 동시에 일반 독자들도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독자입니다. 전공 연구와 교양을 따로 나누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이해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러시아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독자들, 그리고 사회 현상이나 이념에 대해 보다 열린 시각을 가진 독자들이 이 책을 함께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이라는 주제가 워낙 정치적·이념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측면이 있는데요. 조금 더 넓은 시야, 큰 흐름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은 결국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딱 한 문장에만 밑줄을 그어 선물할 수 있다면, 어떤 문장을 고르고 싶으신가요? 그 문장에 담긴 의미와 이유도 함께 들려주세요. "분단 민족의 정체성과 기억과 이념의 뒤엉킴을 추적한 그 혼신의 궤적 위에서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의 자취는 한 번도 사라졌던 적이 없다." 소설가 최인훈의 『화두』를 설명한 마지막 챕터 마지막 문장인데요. 월남 작가로서 북한, 남한, 미국, 구소련을 다 경험한 최인훈의 글쓰기 전체를 보면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의 자취는 한 번도 사라졌던 적이 없습니다. 한반도와 러시아의 관계가 그토록 깊이 각인된 소설가가 또 있을까 생각해요. 분단 문제를 온몸으로 짊어진 이 작가의 『화두』가 마침내 깨달음의 순간에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이 없었다면, 분단과 월남 경험이 없었다면, 최인훈 선생의 『광장』도 없었을 겁니다.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이 제게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요. 책 제목인 『광장의 문학』도 최인훈 소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연세대학교에서의 35년 교직 생활을 마치고, 평창동에서 러시아문학과 문화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러시아를 읽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일종의 ‘러시아 살롱’ 같은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국제 정세로 러시아를 멀리하거나 낯설게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지만 우리 기억에는 여전히 러시아를 향한 오래된 관심, 즉 ‘루소필리아(Russophilia)’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맥을 이어가고자 하니 많이들 편하게 찾아와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