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미국 서부의 한 감자밭에 있던 소년 ‘필로 판즈워스’는 밭고랑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 선들을 보며 영상을 한 줄씩 그려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 상상은 훗날 텔레비전이라는 놀라운 발명으로 이어졌죠. 그리고 다시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화면 속 ‘색’에 질문을 던진 과학자가 있습니다. 9월호 스토리R에서는 자연의 나노구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 ‘리얼 풀 컬러(Real Full Color)’ 기술을 개발한 최수석 교수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상
우수한 연구개발 성과로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 연구개발자를 매월 1명 선정하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과 상금 1천만 원을 수여하는 상
인물탐구
최수석
소속
포항공과대학교 전자전기공학과
주요학력
2006.01. ~ 2010.02.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전기전자공학 박사 (University of Cambridge Engineering, Electrical)
1997.03. ~ 1999.02.
한양대학교 공업화학 석사
1993.03. ~ 1997.02.
한양대학교 공업화학 학사
RGB 너머, 새로운 색을 찾아서
한 가지 기술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익숙함 너머의 새로운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최수석 교수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 특별한 이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LG디스플레이에서 19년간 현장을 누빈 엔지니어로 활약하며 디스플레이 기술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점인데요. 그는 제품의 성능은 물론 공정과 신뢰성, 비용, 실제 구현 가능성까지 두루 고민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씩 마주하게 됩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박사과정 재학(2006~2010) 시절
최 교수가 주목한 건 RGB 방식이 가지는 한계였습니다. 오늘날 디스플레이는 주로 빨강(R), 초록(G), 파랑(B)을 조합해 다양한 색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여러 색을 구현할수록 소재와 픽셀 설계, 공정 자체가 복잡해진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하고 순수한 색을 그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아쉬움도 있었죠.
그가 새로운 실마리를 만난 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박사과정에서였습니다. 이곳에서 ‘카이랄 소재’를 접한 최 교수는 색을 섞어 표현하는 기존 방식과는 다른 접근에 주목했습니다. 이후 포항공과대학교에서 산업 현장에서 품었던 고민을 다시 연구 주제로 꺼내 들었고, RGB 너머의 새로운 색을 향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이어갔습니다.
“카이랄 소재를 접하면서 RGB를 섞지 않고도 구조 자체로 원하는 색과 파장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디스플레이를 연구하며 마주했던 고민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풀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노구조로 다시 쓰는 색의 공식
그렇다면 RGB를 섞지 않고 어떻게 원하는 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답은 의외로 가까운 자연에 있었죠. 나비의 날개가 보는 각도에 따라 오묘하게 빛나고, 카멜레온이 주변 환경에 맞춰 몸의 색을 바꾸는 원리가 새로운 색 구현의 실마리가 됐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구조색’에 있는데요. 색소 대신 미세한 구조가 특정 파장의 빛을 선택적으로 반사하며 다채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원리입니다.
최수석 교수 연구팀은 자연의 원리를 ‘카이랄 나노구조’에 담았습니다. 분자들이 나선 형태로 배열되도록 유도한 뒤, 나선이 한 바퀴 도는 간격인 ‘피치(Pitch)’를 조절해 반사되는 빛의 파장도 함께 달라지게 했죠. 덕분에 복잡한 나노 공정 없이도 구조를 조절해 원하는 색과 파장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는데요. 이 원리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가시광 전 영역의 색을 직접 구현하고 조절하는 ‘리얼 풀 컬러(Real Full Color)’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색은 각각 고유한 빛의 파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기존 디스플레이는 미세한 픽셀 안에서 빨강(R), 초록(G), 파랑(B)의 빛을 조합한 뒤, 각각의 빛이 우리 눈에서 하나의 색으로 합쳐져 보이는 눈의 착시를 이용해 혼색화된 다양한 색을 표현합니다. 리얼 풀 컬러는 이와 달리 나노구조를 변화시켜 원하는 색에 해당하는 고유한 빛의 파장을 직접 선택합니다. 색을 ‘섞는’ 대신 빛의 파장 자체를 ‘고르며’, 색의 공식을 새롭게 쓴 셈이죠.
카이랄(Chiral)성왼손‧오른손처럼 거울에 비친 형태지만 완전히 겹치지 않는 구조적 특성
카이랄 나노구조체를 통한 고유 색의 다중 칼라 파장 구현 및 가변 조절
연구팀의 도전은 원하는 색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카멜레온 피부의 원리를 모사한 ‘인공 전자 피부(Photonic E-Skin)’를 구현해, 잡아당기면 나노구조의 간격이 달라지면서 색도 함께 변화하도록 했죠. 늘어나는 방향과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색이 나타나도록 구현해, 색의 변화만으로 변형 상태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2V의 낮은 전압만으로 원하는 색을 선택할 수 있는 ‘가변 컬러필터’에 이어, 가시광 영역에서 발광 색을 바꾸는 ‘컬러 가변 레이저(Color Tunable LASER)’까지 개발했습니다. 특히 컬러 가변 레이저는 약 1nm 수준의 좁은 선폭으로 높은 색 순도를 구현해, 증강현실(AR)과 홀로그램 같은 차세대 광학 기술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이랄 나노소재 기반 색·파장 제어 및 다기능 광전자 플랫폼 구축
좋은 연구도 좋은 요리처럼!
연구에는 정해진 답도, 완벽한 길잡이도 없습니다. 최수석 교수는 연구를 ‘가보지 않은 불확실한 길에 대한 도전’이라고 정의하는데요. 그는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따라오지만, 그럴 때마다 결과를 세심하게 살피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다음 방향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특히 어려운 문제와 마주할수록 동료 연구자들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배우고, 수정하고, 다시 도전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최 교수가 지향하는 연구자의 모습도 흥미로운데요. 바로 ‘요리사와 같은 융합기술 연구자’입니다. 좋은 요리사가 각각의 재료가 가진 맛과 특성을 이해한 뒤 어울리는 조합을 찾아내듯, 연구자 역시 서로 다른 기술의 특성과 가능성을 깊이 이해해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인데요. 한 분야의 경계에 머무르기보다 다양한 기술을 폭넓게 바라보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연구를 지향합니다.
좋은 요리사가 각각의 재료가 가진 본연의 가치와 조화를 이해해 감동을 주는 요리를 만들듯, 융합기술 연구자도 다양한 기술을 깊이 이해하고 조화롭게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OSTECH 최수석 교수 연구실 연구진
좋은 요리에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지듯, 새로운 연구 역시 서로 다른 생각이 만날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는 혼자 답을 정해두기보다 함께 질문하고, 서로의 생각을 더하며 새로운 조합을 찾아갑니다. 최수석 교수와 연구팀은 오늘도 각자의 아이디어를 한데 모아 아직 세상에 없는 새로운 연구 레시피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속닥속닥! 못 다한 이야기연구자 TMI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요!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먼저 함께 연구해 온 학생들과 동료 연구자들, 그리고 늘 힘이 되어준 가족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수상은 개인의 성과라기보다 오랜 시간 함께 고민하고, 도전해 온 저희 연구진 모두에게 주어진 격려라고 생각해요. 특히, 차세대 디스플레이, 광전자 기술을 꾸준히 연구해 온 과정이 의미 있게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감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수상을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좋은 연구를 이어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우리나라 과학기술과 디스플레이·광전자 분야의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연구하겠습니다.
19년간의 기업 연구소 생활을 거쳐 대학 연구자가 되셨는데요. 산업 현장에서의 경험은 지금의 연구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산업에서는 기술의 성능만큼이나 공정과 신뢰성, 비용,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지, 사용자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반면 대학에서는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새로운 가능성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죠. 저는 산업 현장에서 배운 현실적인 감각과 대학에서의 자유로운 탐구를 연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연구실 안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기술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연구의 중요한 방향 중 하나입니다.
앞으로 5~10년 뒤에는 TV와 스마트폰, 자동차를 넘어 디스플레이가 우리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확장될까요?
앞으로 디스플레이의 중요한 방향은 ‘확장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TV와 스마트폰의 디스플레이도 계속 발전하겠지만, 디스플레이의 기능 자체가 확장되고, 적용되는 대상도 특정 기기를 넘어 다양한 표면(Surface)과 공간(Space)으로 넓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통해 단순히 가상의 정보를 보여주는 시대에서, 보다 실감하고 상호작용하는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특히 디스플레이는 빛과 색, 반도체 기술이 융합된 분야이기 때문에, ‘보는’ 기능을 넘어 센싱, 광원, 정보처리, 소리와 촉각 등 새로운 기능으로 확장될 여지도 매우 큽니다.
교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연구 목표가 궁금합니다.
새로운 연구에는 실패와 고뇌가 따르지만, 이를 하나씩 극복하고 마침내 결실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연구만의 큰 즐거움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도와 개념 증명이 연구실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산업으로 이어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로 쓰이길 바랍니다.
과학자와 공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선배과학자로서 조언과 격려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과학과 공학이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많은 학생들이 과학자와 공학자를 꿈꾼다는 것은 참 반갑고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꿈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신의 노력과 성과만큼 충분히 인정받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선배과학자로서 감히 조언을 전한다면, 주변의 모든 것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일상에서 무엇이 불편한지 유심히 살펴보고, ‘왜 이렇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 꼭 정답일까?’라고 질문해 보세요. 익숙한 것을 당연하게 넘기지 않는 작은 질문이 새로운 발견과 도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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