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도전,
교양 교육의 응전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철학연구회 회장·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박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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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도전, 교양 교육의 응전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철학연구회 회장·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박정하

4차산업혁명 담론이 삶의 일부가 된 지 오래되었고 AI가 미칠 영향력은 다 가늠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사회, 새로운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 그래서 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사회라고 한다. 이런 중립적 담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어엿한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사회이고, 양극화가 강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라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철저히 순응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특히 학생들에게 자주 노출되는 한국의 4차산업혁명 담론은 포스트-휴먼 시대라는 관점에서 미래사회에 대한 포괄적 전망을 제시하기보다는 일자리 문제에 초점을 두고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면 일자리 경쟁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담론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 전체를 우리는 ‘기술의 도전’이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다. 대학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변화에 밀려 전공교육이 급격히 재편되는 상황에서 교양 교육은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할까? 무엇을 더 비중 있게 교육해야 교양 교육은 이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까? 교양 교육의 응전은 세 방향을 향해야 한다.

첫째,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탈락을 위협하는 담론을 날조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직업 환경이 현저히 빠르게 변화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업적 성공을 위해서 전공 못지않게 교양이 큰 의의가 있다는 점은 한 가지 자료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2016 대졸자직업이동경로조사 기초분석보고서’에 따르면(신종각 외, 2017) 졸업 후 ‘전공-직업 일치도’는 평균 48.2% 수준이며, 공학 계열도 53.3%에 불과하다. 대졸자의 50% 이상이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 이미 현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직업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공교육만으로는 부족하고 평생학습능력의 배양에 큰 비중을 두는 교양교육이 필요하다. 평생학습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리터러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리터러시 교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OECD가 제시한 ‘Learning Framework 2030’이 잘 보여준다.(OECD, 2018) 이에 따르면 문자에 대한 전통적인 literacy, 그리고 numeracy에 대한 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술 발전으로 인해 새롭게 부각된 digital literacy와 data literacy 교육도 필수 영역으로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 OECD는 health literacy도 한 독립 항목으로 포함했는데,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코비드19를 겪으면서 포스트-코로나를 고민하는 오늘날에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항목이다.

둘째, 무엇보다 교양 교육 본연의 영역으로 인문학, 기초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을 골고루 교육하는 자유학예(liberal arts & science)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균형 잡힌 기초학문 교육은 기술 발전 시대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오늘날 요구되는 융합 교육을 위해 꼭 필요하다. 융합 교육은 융합된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이 아니라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일 것이다. 지식융합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균형 있게 습득하고 그 연관성에 대한 통찰적 발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초학문을 골고루 교육하는 것은 융합해야 할 재료가 되는 다양한 기초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서 융합 교육의 필수 토대가 된다. 게다가 다양한 학문 영역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융합능력의 전제가 되는 개방적 태도와 문제 해결의 열정도 기를 수 있다. 다음으로 자기성찰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철학자 매킨타이어가 잘 보았듯이 인간은 ‘서사적 존재’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서사(narrative)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인간은 그 서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으며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가 연결된 이야기 속에서 적절히 자리 잡지 못하면 허무와 불행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엄청난 속도로 삶이 변화하고 있으며 미래가 점점 불투명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술 사회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삶의 방향을 계속 추구하는 ‘장인’이 아니라 어디든 써먹을 수 있는 ‘만능인’이 되기를 강요하면서 삶의 파편화를 강화하고 있다.
오늘날 강조되는 역량교육은 어떤 일이든 가능하고 누구와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여 불안정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는 전사를 키우는 교육이라고 미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만 하게 되면 삶에 대한 주체적 관점을 상실한 채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일의 그물망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내러티브를 형성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유하는 인간을 양산할 위험이 크며, 기술 발전 시대에 이런 위험이 더 심화할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적절히 설정하고 이를 성찰하며 지켜나갈 수 있는 자기성찰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한데, 이 능력은 기초학문 중심 교육을 통해서 배양하고 강화할 수 있다. 균형 잡힌 기초학문 교육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을 성찰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 바로 대학이 수행할 지성적 인성교육의 요체가 된다.

셋째, 의사결정 능력, 특히 도덕적 판단력을 배양하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 미래에 대한 논의에서 ‘순응 담론’이 지배적이다. 태풍이 오면 그 방향을 바꾸거나 막을 수 없으니 잘 예측하여 방비하고 대피해야 하듯이, 4차산업혁명의 방향도 정해져 있으므로 남은 일은 오직 순응하고 잘 예측하여 맞추어 나가는 일뿐이라고 한다. 기술의 발전 방향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으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선택 담론’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논의는 의지미래가 아닌 단순미래의 형태로 진행된다. 주체적 선택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이 주체로서 미래의 방향을 선택하지 않게 되면 결국 기술의 발전 방향과 미래는 자본과 권력이 정하게 된다. 단순미래로 진행하는 담론 속에 자본과 권력의 의지미래가 은폐되어 있다.

기술 발전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 의사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 구조의 형성과 더불어 그 주체가 될 수 있는 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학 교양 교육에서 의사결정 능력교육을 체계적이고 밀도 있게 시행해야 한다. 그동안 강조해 왔던 의사소통 능력이나 문제해결 능력 못지않게 의사결정 능력의 배양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특히 기술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타산적이고 실용적인 의사결정 능력보다는 기술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 교육에 중점을 둬야 하며 이미 시행하고 있는 인성교육도 여기로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대학은 인성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초중등교육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에 어울리지 않게 덕성 교육의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이제 대학의 인성교육은 지적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도덕적 판단력을 기르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 방향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주체적 의식과 그 바람직한 방향을 실제로 결정할 수 있는 의사결정 능력을 지닌 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 때 기술의 도전에 대한 교양 교육의 응전이 성공적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교양 교육의 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학 안팎에서 교양 교육에 대한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 대학 내부에서는 한정된 학내 자원을 전공과 교양에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에 대해 교내 합의를 통해 원칙을 정하여 명문화하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 교양이 전공과 동등한 독립된 교육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원 배분의 원칙이 없으면 학교 운영진이 교양 교육에 의지를 갖고 있어도 그때그때 당면 문제 해결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교양 교육은 자꾸 뒤로 처진다. 학내 다수를 차지하는 전공 교수도 교양 교육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원 배분에 대해서는 자기 전공의 몫을 빼앗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현상을 막으려면 미리 원칙과 기준에 합의할 필요가 있다. 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기준으로 함이 합리적이므로 강좌 수나 수강 학생 수 등을 고려해야 할지 모르지만, 이 수준까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예 기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 어떤 배분 기준을 세울지는 대학의 자율적 영역이라 외부에서 간섭할 내용이 아니지만, 그래도 교육부가 관리기관이라 할 수 있으니 각 대학이 배분 원칙을 세우고 있는지 정도는 점검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든다.

국가적으로도 교양 교육에 대해 적절한 배분 원칙을 세워 접근해야 한다. 우선 연구에서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분야분류표’가 연구비 배분의 기본 틀 역할을 하는데 더 빨리 개선되기를 기다려본다.
‘대분류-중분류-소분류-세분류’로 위계화된 이 표에서 현재 교양 교육은 ‘사회과학-교육학-분야교육-교양기초교육’으로 교육학의 세분류에 배치되어 있다. 교양 교육은 인문학, 기초사회과학, 자연과학 전체를 망라하는 영역인데, “교육”이란 말이 붙었다는 이유로 사회과학의 한 분야인 교육학의 세분류로 배치한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런 체계상의 문제점은 비중과 위상에 걸맞은 수준의 연구비를 배정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그 결과 교양 교육에 대한 전문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한국연구재단은 이미 2019년에 연구용역을 발주하여 분류표 개선에 의지를 갖고 노력하였으며, 그 연구는 교양 교육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복합학(대분류)-교양학(중분류)’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분류표 개선이 워낙 복잡한 문제이고 수많은 이해관계 당사자가 개입되는 사안이다 보니 진전이 빠르지 않아서 안타깝다. 합리적 조정을 통해 교양 교육, 혹은 교양학을 중분류 이상에 배치하든가, 그 이전이라도 각종 연구사업에서 교양 교육을 별도의 트랙으로 설정하여 적절한 수준의 연구비를 배정하는 합리적 접근을 기대한다.

연구만이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 영역의 자원 배분에서도 교양 교육에 대해 더 합당한 고려가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교육 영역에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대학지원사업 등을 시행할 때도 적절한 원칙을 세워서 합당한 비율로 교양 교육에 공적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 대학 내외의 이러한 노력이 제자리를 잡는다면 기술의 도전에 대한 교양 교육의 응전이 성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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