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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서재

안다는 확신에 빠진 당신에게, 「의심하는 인간」 국민대학교 박규철 교수

한 권의 책에 담긴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 활자 속 유영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는 일상에 전환점이 되곤 하는데요. 사유의 서재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으로 탄생한 우수학술저서 한 권과 저자 인터뷰,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질문거리를 곁들여 전합니다. 책 너머의 저자, 저자 너머의 빛나는 사유가 담긴 서재에 들어오세요!

하루에도 수백 개의 정보가 쏟아지고, 알고리즘은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건 인공지능이 빠르게 찾아주고, 무엇을 사야 할지 최종 결정까지 추천 알고리즘이 대신하죠. 게다가 그럴듯하게 조합된 가짜 정보들은 진짜인 양 우리 앞에 놓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AI가 제공한 선택과 정보를 우리는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의심하는 인간>은 이 지점에서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박규철 교수는 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에게 묻기를 멈추지 않는 일’, ‘안다는 확신에서 벗어나는 고요하고도 단단한 사유’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요.

박규철 국민대학교 교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에 푹 빠져 관련 연구를 이어가던 중, 서구철학사에서 조명 받지 못했던 고대 회의주의 철학을 만나 연구의 외연을 넓히게 된다. 고대 회의주의 전통을 새롭게 평가해 현대사회의 확증편향과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전하고 있다. 저서 <의심하는 인간>으로 학술적 가치와 독창적 사유를 인정받아 제13회 대한철학회 운제학술상(2022), 한국동서철학회 올해의 저술상(2022)을 수상했다.

#01 책을 쓰다 의심하는 인간의 탄생

  • 교수님 반갑습니다! 웹진 독자들께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국민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그리스 신화와 회의주의 철학, 삶과 윤리를 가르치며 학생들을 만나는 교수인 박규철입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 후 신플라톤주의 철학으로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 현재는 고대 회의주의와 서구 철학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난 2022년, 한국연구재단(이하 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에 참여해 그간의 연구를 종합한 저서 「의심하는 인간」을 출간하게 되었는데요. 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입니다.
  • 「의심하는 인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고대 회의주의에 담긴 깊은 생각과 철학이 현대사회에 주는 의미를 많은 이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예전부터 고대 회의주의에 관해 써 내려간 여러 편의 논문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운이 좋게도 ‘고대 회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과제로 저술출판지원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의심하는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그간의 학술적인 작업이 일반 독자에게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어 매우 기뻤습니다. 한편으로 무거운 책임감도 들었는데요. 회의주의 철학에 근거해 현대인의 일상 속 고민, 나아가 사회적 문제를 해석하고 도울 수 있는 연구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부담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웃음)
  •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 커서만 깜빡거리는 무한의 시간을 보내셨을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방대한 내용을 엮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2019년 재단 사업에 선정되자마자 곧바로 저술 집필에 들어갔습니다. 집필에 몰두하던 때는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어요. 2세기 후반,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안토니누스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주저 <명상록>을 완성했듯이, 저 또한 팬데믹 시기에 원고를 쓰게 된 셈이죠. 당시 녹화 강의, 줌(Zoom) 등 비대면 수업으로 이루어져 나머지 시간을 온전히 원고 집필에 쏟을 수 있었어요. 학교 연구실이나 집 서재에서 작업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 분이 있으실 텐데요. 저는 동네 카페에서 루틴하게 원고를 썼어요. 작업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정해진 시간에 일정 분량의 원고를 완성했습니다. 사실 지금 인터뷰 답변서도 동네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작성하고 있어요. (웃음) 돌아보니 집필에만 꼬박 3년이 걸렸네요. 「의심하는 인간」이 출간한 2022년 6월 29일, 저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작업 중간에는 글이 써지지 않아 낙담하기도 했지만, 결국 원고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게 되어 얼마나 기쁘던지요!
  • 「의심하는 인간」은 어떤 책인가요? 가장 먼저 책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의심하는 인간」은 라틴어 ‘호모 두비탄스(homo dubitans)’를 번역한 것으로, 제가 만든 개념이에요. 고대 회의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의심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으로, 절대적인 확실성을 거부한 채 판단 유보를 통해 삶의 평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는데요. 그들이 추구했던 ‘진리를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존재’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저서 이름을 정했습니다. 독단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며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질문을 강조하는 태도를 나타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즉, 「의심하는 인간」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독단과 확증 편향 문제를 고대 회의주의 철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철학적 탐구서입니다.
  • 책에 담긴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정치, 경제, 종교 등 현대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독단’과 ‘소통 부재’가 인간의 불안을 점점 증폭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대 회의주의 철학의 의미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 철학이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무리한 확신을 피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임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오류 불가능성’만을 천착하던 전통적 철학사에서 벗어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회의주의 철학사를 계보학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렇게 확실성을 추구했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 이전에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02 책을 읽다 의심의 바다를 항해하는 중

  • 철학의 영토에서 소위 ‘소외자’로 존재했던 고대 회의주의(론자)에 시선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전부터 신념과 행복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요. 제대로 된 연구는 하지 못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 연구에 눈길을 두게 될 즈음, 확증편향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죠. 아시다시피 확증편향은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신념이나 견해를 뒷받침하는 정보는 적극적으로 찾고 신뢰하는 반면, 반대 증거나 의견은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저는 현대인들의 불행과 갈등, 그리고 분쟁의 저변에는 ‘확증편향’이라는 인지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문제는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통찰과 지혜에 근거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죠. 전통적인 철학사에서 소위 ‘마이너 영역’으로 간주했지만, 다른 이들이 돌아보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고대 회의주의 연구를 지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고대 회의주의가 진리에 대한 독단을 거부하고, 의심을 새로운 인간의 원동력으로 삼는 독창적인 철학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잠깐 언급하신 것처럼 회의주의는 냉소적이고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로 부정적으로 비치곤 합니다. 또 모른다는 걸 약점이라 느끼기 쉬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회의주의는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이 책에서 회의주의를 다른 시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대 회의주의가 단순한 냉소나 부정, 무조건적인 판단 유보로 오해받고 소외된 점에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가 단순히 모르겠다며 삶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장에 맹목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고 탐구하는 열린 지성의 자세임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특히 현대 사회는 ‘확실성’과 ‘명확한 답’을 강하게 요구하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엔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이 더 많다는 점에 주목했죠. 이런 현실에서 모른다고 인정하는 회의주의적 태도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현명한 삶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이를 통해 삶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내면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회의주의가 필수적인 삶의 도구임을 재조명했습니다. 현대인의 복잡하고 불안한 삶 속에서 ‘의심’은 진리를 독단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열린 태도와 성찰을 통해 계속 성장하는 철학적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회의주의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철학적 태도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대 회의주의를 재해석했죠.
  • 생각이라는 게 온전히 같을 수 없겠지만 어떤 학파, 어떤 철학자의 회의주의 이론이 교수님의 생각과 가장 유사한지, 그 이유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아카데미 학파, 피론주의 학파
    고대 회의주의의 두 갈래
    한 명만 꼽는다면 아카데미 학파, 그 중 카르네아데스를 꼽을 수 있겠네요. 아카데미 학파는 피론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학파의 시조로 소크라테스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연구로부터 철학을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고대 회의주의를 연구하고 있는데요. 이런 관점에서 피론 학파보다는 아카데미 학파에 조금 더 애정을 가지고 있죠. 카르네아데스 회의주의는 진리를 완전하게 확정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에서의 행동과 판단에 있어서 ‘개연성 있는 감각표상’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판단을 인정한다는 점이 특징인데요. 이 점이 제가 추구하는 연구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독단적인 확신을 피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죠. 열린 의심과 판단 유보를 통한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제 철학적 태도와도 가까운 것 같습니다.
  • 여러 철학자가 회의주의에 대한 다양한 견지를 드러냈는데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회의주의’는 무엇일까요? 어떤 의견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열린 의심을 유지하는 태도이며, 이를 인간 존재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이해하는 철학적 자세입니다. 전통 철학사에서 철저히 소외당한 고대 회의주의를 새롭게 평가하면서, 회의주의가 단순히 부정적 회피나 냉소가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삶의 기술이며 마음의 평안(평정심)을 통한 궁극적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탐구 없이 세상을 규정지으려는 독단과 아집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지혜의 덕목이며, 우리가 ‘나’로서 바로 서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확신과 독단의 늪에서 빠져나와 불확실하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평온과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태도 말이죠.

#03 책을 건네다 여전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독자가 있나요? 확실한 답과 빠른 결론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삶과 진리,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에 대한 인식에서 경직되지 않고 열린 태도를 지니고자 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특히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성숙해지고자 하는 대학생, 청년 지식인,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직장인, 나아가 비판적 사고력과 자기 성찰을 키우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자신이 ‘모른다’라는 사실을 약점이 아니라 지혜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싶거나 기존의 독단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열린 지성인의 자세를 갖추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건네고 싶네요.
  •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한 문장에 밑줄을 그어 선물할 수 있다면요? “진리는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이다”입니다. 이 문장이 전체의 철학적 메시지와 핵심 태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책의 첫 문장으로 적혀있기도 해요. (웃음) 진리는 단순히 소유하거나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와 열린 의심, 그리고 성찰의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삶의 목표라 생각합니다. 이 말은 진리를 독단적으로 확신하거나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자만하는 태도를 경계하며, 진리 탐구는 항상 불확실성과 의심 속에서 계속 진행해야 하는 동적인 과정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독단과 아집을 버리고, 언제나 질문하며 성장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회의주의적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진리는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이나 확실성에 안주하지 말고,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탐구하는 태도를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모든 진리는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의심과 성찰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과정 자체를 삶의 성장과 평온함으로 연결하는 지혜를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당신의 의심이야말로 더 넓은 세계와 심오한 자기 이해로 나아가는 출발점임을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