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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의 서재

새로운 과학을 마주한 당신에게
「휘어진 시대」
한양대학교 남 영 교수

한 권의 책에 담긴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 활자 속 유영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는 일상에 전환점이 되곤 하는데요. 사유(思惟)의 서재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으로 탄생한 우수학술저서 한 권과 저자 인터뷰,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질문거리를 곁들여 전합니다. 책 너머의 저자, 저자 너머의 빛나는 사유가 담긴 서재에 들어오세요!

AI, 양자컴퓨터, 핵융합 등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는 시대. 우리는 과학과 함께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지 물음표로 남는데요. 과학이 가장 치열하고 불안정했던 20세기 초는 어땠을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전쟁과 권력, 윤리와 이념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마주하며 현실과 충돌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이하 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으로 출간되어 2023년 우수학술저서(세종도서)로 선정된 「휘어진 시대」의 저자 남영 교수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잠시 멈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건넵니다. 「휘어진 시대」는 20세기 과학이 전쟁과 권력 속에서 어떻게 휘어졌는지를 조망하며, 원자폭탄 개발로 이어지는 과정은 영화 〈오펜하이머>와 같은 시대적 맥락을 공유합니다. 과학이 순수한 탐구를 넘어 정치·사회와 어떻게 얽히는지에 대한 사유의 장을 지금부터 펼쳐보겠습니다.

남 영 한양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기술의 역사와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저술과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 교과목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 <과학자의 리더십> 등을 강의하면서 저명강의교수로 선정된 바 있으며, 수업 내용을 책으로 옮겨 「태양을 멈춘 사람들」(2016), 「젊은 과학도를 위한 한줄 질문 1,2」(2017), 「휘어진 시대 1,2,3」(2023), 「청소년을 위한 과학혁명」(2024) 등을 집필했다. 「휘어진 시대」는 2023년 제6회 샤롯데 한국출판문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01 책을 쓰다 휘어진 시대의 탄생

  • 남영 교수님 반갑습니다! 웹진 독자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에서 과학기술의 역사와 과학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교수이자 작가 남영입니다. 대표작으로는 직접 개발한 교과목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와 <과학자의 리더십>을 책으로 옮긴 「태양을 멈춘 사람들」과 「휘어진 시대」를 꼽고 싶은데요. 특히 「휘어진 시대」는 2023년 제6회 샤롯데 한국출판문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더없이 기쁜 마음입니다. 이렇게 의미 있는 책으로 독자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뜻깊습니다.
  • 「휘어진 시대」는 「태양을 멈춘 사람들」 이후 오랜 준비 끝에 완성된 대작인데요.
    출간 배경에 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2010년부터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라는 강의를 운영하며 지동설 혁명을 깊이 있게 다뤄왔고, 이 수업의 내용을 바탕으로 2016년 「태양을 멈춘 사람들」을 출간했습니다. 그 뒤를 잇는 속편으로 2013년에는 20세기 전반 물리학의 역사를 다룬 <과학자의 리더십>을 설계해 강의를 시작했는데요. 자연스럽게 이 내용 역시 책으로 엮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전작보다 훨씬 방대한 내용을 다뤄야 했기에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2017년 기본 구상을 마친 뒤 2018년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선정되어 긴 준비 끝에 2023년 4월, 「휘어진 시대」를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저술출판지원사업이 없다면 집필을 끝낼 엄두도 못 냈을 것 같습니다. 완성된 원고를 보니 100만 자가 넘더군요. (웃음) 코로나 시기도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 의외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휘어진 시대」는 저에게 있어 단순한 저술을 넘어, 오랜 강의와 사유의 결실이었습니다. 긴 여정을 가능하게 해준 재단에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드립니다.
  • 「휘어진 시대」라는 제목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제목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휘어진’은 상대성이론의 휘어진 시공에서 따온 말입니다. 현대 과학이 이룬 가장 찬란한 성취를 상징하는 표현이죠. 반면 이 책이 다루는 시대는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즉 과학이 정점에 올랐음과 동시에 참혹하게 왜곡되어 휘어진 시대이기도 했던 겁니다. 그래서 고귀함과 저열함이라는 시대의 양면성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말로 ‘휘어짐’을 채택해, 「휘어진 시대」라는 제목을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 기존 과학 교양서와 구분되는 「휘어진 시대」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휘어진 시대」는 과학사학자가 쓴 과학대중서라는 점입니다. 과학을 깊이 있게 설명하는 일은 뛰어난 과학자들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과학사학자로서 시대와 과학자의 상호작용에 집중해 집필했습니다. 둘째, 국내 저자가 국내 독자들을 위해 쓴, 시대 중심의 과학사 책이라는 겁니다. 번역서와 달리 한국어의 맥락과 표현이 살아 있어 이해가 훨씬 수월합니다. 윤봉길과 이육사가 등장하는 과학사 책은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네요. 셋째, 대학에서 강의하며 학생들과 소통한 과정들이 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점입니다. 10년 넘게 강의하며 수천 번의 질의응답을 나눈 결과물이기에, 어려운 학술적 개념들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듬어졌습니다. 덕분에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과학자와 일련의 사건을 정교하게 엮어내셨어요.
    가장 공들인 부분이 어디인가요?
    인물을 선택하는 부분이에요. 집필 중 알게 된 사실이 많아지고, 참고문헌은 쌓여갔으며, 다루고 싶은 인물과 일화들도 계속 늘어났거든요. 하지만 10권짜리 책을 만들 순 없을 노릇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덜어냈는데, 못내 아쉽기도 합니다. 항상 학생들에게 “과학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그것이 훨씬 더 재미있고 감동적이다”고 강조해 왔는데, 이번 집필 과정에서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답니다. 서사 배치도 난제였습니다. 「휘어진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동시대인이자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각 인물의 생애를 따로따로 서술했다면 단순히 위인전 묶음에 불과했을 겁니다. 그래서 전체를 6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각 장마다 중심인물을 설정해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구성했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차례가 계속해서 바뀌다가 결국 머릿속에 구상한 이야기는 현재의 세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답니다.

#02 책을 읽다 시대를 관통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

  • 「휘어진 시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휘어진 시대」는 시대에 따라 세 권, 총 6부로 구성됩니다. 1권은 원자 연구와 상대성이론이 탄생한 1895~ 1919년, 2권은 양자역학의 성립과 나치에 의해 유럽 과학이 무너져간 1920~1939년, 3권은 원자폭탄이라는 재앙을 낳은 1939~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또한 성격에 따라 두 갈래로 나눠볼 수도 있습니다. 1~3부가 과학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을 과학자 중심으로 풀어낸 이야기라면, 4~6부는 과학과 정치가 맞물리며 거대과학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3부에서는 독자 분들도 예상할 수 있는 과학자들의 얘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4~6부에서는 범주와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1~3부를 읽고 뢴트겐이나 퀴리 부부의 작업과 오펜하이머의 작업을 비교해 보세요. ‘과학’이라는 한 단어로 묶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일 겁니다. 4~6부에서는 그로브스(군인)이나 루스벨트(정치인)처럼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에 큰 영향을 미친 존재들의 이야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과학자들이 연구실을 넘어 정치와 사회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하는 과정도 보여주지요. 이러한 장면들과 과학자들의 경험 이야기가 함께한다면 ‘진화하거나 혹은 타락해가는’ 현대 과학의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되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1권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 인류적 재난 속에서 빛이 바랜 아름다운 과학혁명의 시대!
  • 2권 과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양자역학이라는 거대한 충격의 전주곡이 울려퍼지다!
  • 3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전쟁이 과학을 삼키더니 결국은 과학이 전쟁을 삼켜버렸다!
  • 집필하실 때 마리 퀴리의 라듐과 폴로늄 발견처럼 각 과학자의 ‘중요한 순간’에 집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대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극적인 순간’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결정적 순간이란 과학자를 과학자답게 만들어 주는 순간을 뜻합니다. 즉 초등학교 위인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 업적의 정수를 빚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탐구와 끝없는 시행착오의 순간들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과학자의 삶에 대해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과학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는 거의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결정적 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런 학문적 공백을 메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현대 과학도 과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과학자들을 과학자답게 만드는 ‘극적인 순간’은 드러나지 않은 치열한 탐구와 성찰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고 있습니다.
  • 「휘어진 시대」는 여러 과학자들의 삶과 연구가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집단적 서사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라고 보시는지요.
    집필하면서 특정 과학자의 생애를 기록하는 전기가 아니라, 과학자들의 삶과 연구가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과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작품의 시대성을 포괄하는 대표자를 꼽는다면, 막스 플랑크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플랑크에게 헌사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차디찬 열차 칸에 몸을 의탁한 채, 동료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멸망한 국가의 파괴된 도시들을 돌며, 치유의 강연을 계속했던 구순의 노인 플랑크에게 과학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장은 제가 오래도록 곱씹었던 질문이자 플랑크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현입니다. 동시에 책을 마무리하며 독자에게 남기고 싶었던 최종적인 여운이기도 합니다. 차디찬 열차 칸에 몸을 의탁한 채 동료등이 모두 사라져버린 멸망한 국가의 파괴된 도시들을 돌며 치유의 강연을 계속했던 구순의 노인 플랑크에게 과학은 무엇이었을까?
  • 오늘날 과학 역시 집단 연구, 자금, 정책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휘어진 시대」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과학자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위대한 과학자는 없다. 위대한 과학자들이 있을 뿐이다.”
    학생들에게 과학은 과학자들의 ‘연결’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연결’은 단순 과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책임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학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후학을 길러내며, 연구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면서요. 이것이 현대 과학에서 과학자에게 요구하는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퀴리 부부, 막스 플랑크, 톰슨과 러더퍼드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 분들도 자연스럽게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03 책을 건네다 지금, 과학을 연결할 때

  • 「휘어진 시대」를 권하고픈 독자층은 누구인가요? 집필 당시에는 대학생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상상했습니다. 실제로는 중년 독자 분들이 가장 많이 찾아주셨다고 하더군요. (웃음) 이 책은 ‘중급자를 위한 책’을 표방합니다. 깊이 있는 과학 이야기에 관심은 있지만, 전문 이론까지 파고들 자신은 없는 분들에게 추천드려요. 20세기 전반은 비극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과학의 낭만이 살아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독자 분들도 그 시대를 함께 느껴본다면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과학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 교수님이 생각하는 이 책의 ‘독서 포인트’는 무엇인가요? 「휘어진 시대」에서는 과학자들의 공과 과가 함께 등장하고, 약한 모습도 나옵니다. 인물의 공과 과를 정확히 아는 것은 그에게서 무엇을 본받아야 할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또 성인군자가 아닌 인간적인 과학자의 모습을 만날 때 우리는 그들을 훨씬 가깝게 느낄 수 있죠. 과학자들의 인간적 약점을 굳이 실었던 것은 그들을 가볍게 보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 과학자들을 친근하게 느끼고, 많은 울림을 얻을 수 있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이 중요한 독서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할 후속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전공 역사를 깊고 넓게 바라보기 바랍니다. 역사는 결국 스토리이고, 과학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해는 과학자에 대해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또 선각자, 선배 과학자들에 대한 감정이입도 중요합니다. 타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배울 때, 스스로를 움직이는 동력도 얻게 되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역사 속 과학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길 권합니다.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시대를 보면 인간이 보이고, 인간을 알면 일이 보이며, 그때야 비로소 그 일의 가치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휘어진 시대」가 이러한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전하는 매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