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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의 서재

전염병 없는 세상을 꿈꾸는 당신께
「전염병의 지리학」
인하대학교 박선미 교수

한 권의 책에 담긴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 활자 속 유영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는 일상에 전환점이 되곤 하는데요. 사유(思惟)의 서재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으로 탄생한 우수학술저서 한 권과 저자 인터뷰,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질문거리를 곁들여 전합니다. 책 너머의 저자, 저자 너머의 빛나는 사유가 담긴 서재에 들어오세요!

누구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 곁에 존재했던 전염병. 바이러스가 지나간 길 위에는 두려움과 실체 없는 소문, 심지어 불평등과 낙인까지 어둡게 번져갔습니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던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박선미 작가는 지도를 펼쳐 ‘전염병’을 새로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전염병의 지리학」은 지리학이라는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전염병을 공간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전염병 그 너머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모두가 안전한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그려야 할지 함께 고민해 봅니다.

박선미 인하대학교 교수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부 및 대학원에서 사회과 교육, 다문화 교육 및 부와 빈곤의 글로벌 지도 등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저술출판지원사업을 통해 저서 「전염병의 지리학」을 발간해 인류를 괴롭혀 온 각종 전염병의 사례를 지리학적 시각으로 해석하며 2023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01 책을 쓰다 전염병과 지리학, 둘을 연결하기까지

  • 박선미 교수님 반갑습니다! 웹진 독자들께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박선미 교수입니다. 저는 사회과 교사가 갖추어야 할 전문적 소양, 공간 불평등 문제, 세계시민성과 다문화교육을 주제로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빈곤의 연대기」, 「한국 지리교육과정의 쟁점과 전망」, 「사회과 평가론」, 「전염병의 지리학」 등 여러 저서를 집필해 왔는데요. 이번에 「전염병의 지리학」을 계기로 한국연구재단 웹진 독자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무척 반갑고 뜻깊습니다. (웃음)
  • 약 2년 동안 『전염병의 지리학』 집필에 몰두하셨다고요.
    출간 배경에 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최근 연구 환경이 단기적 성과 중심으로 흐르면서, 긴 호흡의 집필 작업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은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연구재단 저술출판지원사업에 선정된 것은 집필을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전염병을 지역 안팎의 다양한 행위자 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탐구하려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수 있었고, 결국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습니다. 장기간의 집필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재단의 사업은 학술 연구와 교양 저술의 발전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전염병 관련 서적은 의학·역사학 관점에서 풀어내는 경우가 많은데요.
    ‘지리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염병은 단순히 환경에서 생겨나고 퍼지는 의학적인 사건을 넘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사회 구조를 비추는 일종의 ‘거울’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염병은 정치적 선택, 경제적 이해관계, 사회적 조건, 역사적 맥락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전염병을 지리학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전염병이 어떻게 지역의 변화를 불러왔는지, 사람들이 그 지역을 바라보는 이미지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지역마다 대응 방식이 왜 달랐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법을 의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전염병의 역사를 연대기처럼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아요. 대신 전염병을 통해 한 지역의 정치·경제·사회적 특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지역과 지역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 해당 저서를 다듬고 계실 때 코로나19가 유행했다고요. 맞습니다. 재단 사업에 선정됐을 때는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어요. 처음에는 전염병뿐 아니라 환경 변화로 발생하는 질병을 함께 다루고자 ‘암 마을’이라는 장을 기획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공장이나 발전소가 내뿜는 발암물질로 인해 주변 농촌 지역의 암 발병률이 높게 나타나는 사례를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현지 조사가 어려워지면서 구성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읽다’라는 장과 전염병 대응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다룬 ‘코로나19, 소환된 국가 그리고 좋은 정부’ 두 장을 새로 추가했습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방대한 데이터와 연구 자료가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기에, 오히려 내용을 더 폭넓게 다듬고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02 책을 읽다 전염병을 거슬러, 결국 전염병을 앞서는!

  • 『전염병의 지리학』은 전염병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책의 흐름을 소개해 주세요.
    크게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첫 번째는 전염병과 혐오 및 편견과의 관계(1~2장)입니다. 19세기 콜레라와 장티푸스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 당시 사회‧문화적 편견과 혐오, 차별을 어떻게 키워갔는지를 살펴봤어요. 동시에 전염병 통제를 통해 근대적 공중위생 시스템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습니다. 두 번째는 전염병과 서구·비서구의 구분(3~5장)입니다. 코로나19, 스페인 독감, 말라리아를 사례로 전염병이 서구와 비서구를 나누는 허위의식을 어떻게 강화해 가는지, 또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편견이 전염병 인식에 어떤 왜곡을 가져왔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세 번째는 전염병과 세계화(6~7장)입니다. 다제내성 결핵*과 서아프리카 에볼라 사태를 중심으로, 냉전 해체와 세계화가 전염병의 발생과 확산에 미친 영향,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국가와 국제사회의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분석했어요. 마지막으로 전염병 대응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국가의 역할(8~9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각국의 에이즈 대응 과정에서 시민단체 간의 초국적 연대가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살펴보고, 코로나19 대응에서 정부의 정책 선택과 집행 능력, 시민들의 신뢰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항생제에 내성을 가지고 있어 치료가 어려운 결핵
  • 1~2장 전염병과 혐오
    및 편견과의 관계 콜레라, 장티푸스
  • 3~5장 전염병과
    서구·비서구의 구분 코로나19,
    스페인 독감, 말라리아
  • 6~7장 전염병과 세계화 다제내성 결핵,
    서아프리카 에볼라
  • 8~9장 전염병 대응과정에서
    시민사회와 국가의 역할 에이즈, 코로나19
  • 전염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둬야 할 키워드가 있다면요? ‘건강 불평등’과 ‘세계화’, 이렇게 두 가지 키워드를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전염병은 ‘건강 불평등’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나쁜 건강 상태는 대체로 빈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빈곤은 단순히 소득이나 기술, 사회 자본의 부족을 넘어 경제적·사회문화적 구조의 산물이기도 하거든요. 가난한 사람일수록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고 치료 기회는 적으며, 선진국보다 저개발국에서 피해가 훨씬 크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건강은 개인의 책임을 넘어 국가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긴밀히 맞물려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세계화’인데요.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전염병은 더 이상 한 지역, 한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적 상호의존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전염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이죠. 그 결과 전염병의 확산 속도와 양상은 더 복잡해졌고, 빈곤 지역과 부유한 지역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국경을 초월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팬데믹은 세계 전체의 보건 안전을 위협하며, 정부·국제기구·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은 필수가 되었죠. 결국 전염병의 본질에 한 발 더 다가서기 위해서는 ‘건강 불평등’과 ‘세계화’라는 두 축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모두가 안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안전할 수 없다”라는 문구가 인상 깊었어요.
    건강 불평등과 전염병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사례를 소개해 주세요.
    옆집에 불이 났을 때 문틈을 수건으로 막아 연기를 막으려 해도, 결국 연기는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전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경을 막고, 지역을 봉쇄해도 차단하기 어렵고,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에볼라 전염병의 경우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 지역에서 24차례나 발생했지만, 대부분 국경을 넘지 않아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요. 그러나 2014년 기니에서 시작된 에볼라 바이러스는 더 이상 서아프리카의 빈곤 지역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나이지리아, 미국, 유럽 등 여러 나라까지 확산되며 세계적 위협으로 떠올랐습니다. 서아프리카의 피해에 소극적이던 국제사회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WHO의 국제보건비상사태 선포, 미국·영국·프랑스의 의료 지원, UN의 에볼라 긴급대응팀 출범, 제약사의 백신 개발 등이 그 결과였죠. 이는 과학기술의 자연스러운 진보가 아닌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받는다고 느낀 순간에야 이루어진 대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모든 전염병은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기기에 경중을 따지기 어렵긴 합니다만,
    생각하시는 ‘인류 최악의 전염병’은 무엇이며, 그 이유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인류 최악의 전염병은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가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강타하며 약 700만 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19세기 콜레라와 1918년 스페인 독감, 1980년대 에이즈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5천만에서 1억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고, 콜레라는 순식간에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에이즈는 질병 그 자체보다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통해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냈지요. 당시 에이즈 환자들은 차별과 배제 속에서 ‘악마 취급’을 받을 정도로 사회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결국 전염병은 단순한 사망자 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페인 독감이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남겼다면, 콜레라와 에이즈는 사회적 혐오와 갈등을 증폭시켰습니다. 이렇게 볼 때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와 갈등을 키운 전염병들이야말로 그 피해의 성격상 ‘최악의 전염병’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03 책을 건네다 전염병과 거리두기 중인 이들에게

  • 대학에서 『전염병의 지리학』과 동명의 강의가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수업 현장에서 학생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전염병의 지리학’ 강의는 인하대학교에서 핵심교양 융복합 과목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매 학기 두 강좌가 열리는데 지리학과 역사학은 물론 의학, 정치경제학을 아우르는 융합적 수업이다 보니 전공이 다양한 학생들이 함께 수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은 RNA 바이러스 변이, 레트로바이러스의 단백질 생산 과정 같은 부분을 조금 어려워하기도 하는데요. 이런 자연과학적 지식이 사회 현상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흥미를 갖고 몰입하더라고요. 이공계 학생들은 전염병 대응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공 이익의 균형, 자선 자본주의와 말라리아 정책, 약품 특허권과 아프리카 에이즈 문제 등 사회적 쟁점을 탐구할 때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만큼 학생들의 흥미에 맞는 방향으로 수업을 꾸준히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웃음)
  • 책 읽기 좋은 가을. 마음의 양식을 쌓고자 서점을 찾는 이들이 많을 텐데요.
    작가님의 책을 발견한 이들에게 딱 ‘한 챕터’에 책갈피를 남겨줄 수 있다면?
    이 책을 집필하면서 제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그 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징표라는 점입니다. 제가 말하는 ‘야만’은 문명의 반대가 아니라, 문명 속에 잠재한 광기와 증오입니다. 이러한 광기와 증오는 불안과 공포를 낳고, 결국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립니다. 야만이 계속해서 힘을 얻는 사회에는 미래와 희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3장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읽다」의 마지막 문단을 독자 여러분의 책갈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제3장의 마지막 문단 인류학자인 마가렛 미드는 “문명의 첫 징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대부분은 미드가 테라코타 화분이나 석기 그라인더라고 답할 것을 기대했으나 그 기대와 달리 그녀는 고대 문화에서 문명의 첫 징조를 부러졌다가 치유된 대퇴골이라고 답변했다. 동물의 세계라면 대퇴골이 부러졌다면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고, 강에 가서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구할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다. 미드는 대퇴골이 부러진 동물 중에서 뼈가 치유되어 살아남는 동물은 없다면서 부러진 대퇴골이 아물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다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내어 상처를 가린 뒤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치료를 도왔다는 증거라고 하면서 “문명은 고난 속에서 다른 누군가를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며 그 이유를 말했다. 문명은 고난 속에서 다른 누군가를 돕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전염병의 지리학」을 통해 얻어갔으면 하는 인사이트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 책을 통해 전염병의 위기를 겪으며 우리가 믿어온 발전과 번영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전염병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를 불러왔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종종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를 벗어나려 하지만, 에이즈와 코로나19의 사례가 보여주듯 문제의 해법은 강자와 약자의 협력,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정부에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새로운 전염병, 금융위기, 기후 위기, 국제 분쟁 같은 위기는 반복될 것입니다. 이때 국가가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지, 억압하는 악당이 될지는 민주적 통제에 달려 있습니다.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며 타인과 연대하는 시민이 있을 때 국가는 투명하고 책임 있게 운영될 수 있습니다. 결국 정부의 질은 시민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전염병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변화를 이끌어 온 계기이기도 합니다. 「전염병의 지리학」은 전염병 이면의 사회적‧공간적 불평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그리고 대응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민과 정부의 역할을 함께 살펴보려는 책입니다. 이 책이 더 나은 공동체와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