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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열린 벽란도 - 만남이 만든 지식의 항로

    한 사람이 오면
    그의 세계도 함께 온다 이화여자대학교 윤여민 교수

    고려 시대, 사람과 물자가 국경을 넘어 오가던 국제 무역항 벽란도.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던 그 문이 오늘날 연구 현장에서 다시 열립니다. 문을 넘어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이와 함께 오랜 시간 품어온 질문과 지식,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향한 기대도 국경을 건너왔는데요. 다시 열린 벽란도는 한국연구재단 해외우수과학자유치사업으로 이어진 만남과 그 만남이 바꾼 연구의 풍경을 전합니다. 사람과 지식이 오가는 오늘의 벽란도, 그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함께 걸어가 볼까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속 구절이죠. 오랜 시간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의 걸음에는 그간 쌓아온 경험과 아직 펼치지 않은 내일이 함께하는데요. 미국에서 안전한 물을 위한 연구를 이어온 윤여민 이화여자대학교 환경공학과 석좌교수는 익숙한 고향에서 새로운 시작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귀환은 어떤 만남과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있을까요?

    인물탐구

    윤여민

    소속

    이화여자대학교 환경공학과 석좌교수(수처리)

    주요 학력

    • 1999.01. ~ 2001.12. University of Colorado at Boulder 박사(환경공학)
    • 1996.08. ~ 1998.12. University of Colorado at Boulder 석사(환경공학)
    • 1990.03. ~ 1996.02. 경기대학교 학사(환경공학)

    주요 이력

    • 2020. ~ 2026. 국제학술지 Chemosphere 공동편집장(Co-Editor-in-Chief)
    • 2019. ~ 현재 국제학술지 Case Studies in Chemical and Environmental Engineering 편집위원
    • 2005. ~ 2008. CH2M 수석 프로젝트 엔지니어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 그가 선택한 것

    물 한 잔을 마실 때 그 안에 무엇이 남아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윤여민 교수는 우리가 마시는 물을 깊이 들여다봐 왔습니다. ‘어떻게 더 안전한 물을 만들 것인가.’ 오랜 시간 그의 연구를 이끌어온 질문입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의약품이나 생활화학제품에서 비롯된 미량오염물질입니다. 기존 처리시설에서 제거하기 어려운 물질도 있어, 물속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데요. 이를 바탕으로 오염물질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소재와 공정을 찾는 것이 그의 연구입니다.

    윤 교수는 경기대학교에서 환경공학을 공부한 뒤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후연구원으로 연구 경험을 쌓았고, 글로벌 엔지니어링 기업 CH2M에서는 수석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그는 기업에서 연구한 기술이 실제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을 배웠습니다. ‘실험실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기술을 현장에서 쓸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하며, 기술의 효율성과 현장 적용성을 두루 살피는 시선은 그렇게 길러졌습니다.

    박사과정 시절,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선 윤여민 교수(중앙)

    이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서 15년간 연구와 교육을 이어온 그에게 한국에서 새롭게 도전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Ewha Frontier 10-10 사업을 통해 연구 기회를 얻었고, 2023년에는 한국연구재단 해외우수과학자유치사업 Brain Pool+(해외우수과학자유치사업, 이하 BP+)에 선정됐습니다. 미국에서 쌓아온 경험을 국내 연구진과 나누며 새로운 수처리 소재와 공정을 탐색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오랫동안 일궈온 연구 기반과 익숙한 일상을 떠나는 데에는 망설임도 따랐습니다. BP+의 장기적인 지원과 이화여대의 연구 기반은 그가 다음 걸음을 내디딜 힘이 됐습니다. 한국에서도 연구를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면서, 마음속에 그렸던 귀국은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습니다.

    “BP의 지원은 단순히 연구비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해외 연구자가 한국 연구 생태계에 뿌리내리고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기반이라고 느꼈습니다.”

    [ 해외 연구자의 새로운 시작을 돕는 Brain Pool+ ]

    구분, 내용
    구분 내용
    어떤 사업인가요? 해외 우수 연구자를 국내 연구기관에 유치해
    연구 역량을 높이고, 장기적인 정착과 연구를 지원하는 사업
    무엇을 돕나요? 해외에서 쌓은 전문성과 경험이
    국내 연구자와의 공동연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구·정착 기반 마련
    (인건비, 연구비, 이주비 등 세부 지원 내용은 연도별 사업 공고에 따라 상이)
    어떤 변화를 지향하나요? 국내외 연구진의 협력과 인재 양성,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확장

    연구자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인 그에게는 가족 곁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서대문구와 마포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에게 이화여대는 어린 날의 기억과 맞닿은 곳이었는데요. 마포에 계신 어머니를 비롯해 양가 부모님과 더 자주 만나고 안부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돌아올 이유를 더해주었습니다.

    한국은 제게 단순히 새로운 연구지가 아니라, 학창 시절의 기억과 가족의 삶이 이어져 있는 곳입니다. 연구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동시에 가족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화여자대학교로의 이직은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캠퍼스에 새봄이 찾아온 2024년, 윤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연구와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은퇴 이후로 그려두었던 귀환보다 약 10년 이른 출발이었습니다. 익숙한 고향에서 아직 해보지 않은 연구를 시작하고, 그리웠던 사람들과 오늘을 나누는 삶. 그는 먼 훗날의 계획을 지금의 일상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문을 넘자, 곁을 내어준 사람들

    고향의 풍경은 반가웠지만, 윤여민 교수가 다시 익혀야 할 것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연구비를 집행하는 방법부터 장비와 실험실을 운영하는 절차까지, 미국에서 익숙했던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연구를 이어가는 동시에 연구 환경도 새롭게 마련해야 했죠. 그는 모르는 것을 혼자 짐작하기보다 먼저 물었습니다. 차근차근 시작하려는 그의 마음 곁으로, 동료 교수와 행정 담당자들이 다가왔습니다. 경험을 나누고 필요한 사람을 연결해 주었죠. 물어볼 곳과 문제를 함께 풀어갈 사람이 생기면서, 낯선 절차도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연구실 안에서는 구성원들과 자주 대화하며 실험 환경과 업무 방식을 조율했습니다. 생활과 연구의 기반이 갖춰지고,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연구 이야기를 나누며 공동의 관심사를 구체화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비로소 이곳에 적응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적응은 어느 한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연구를 함께 진행하면서 조금씩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실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제 그의 연구실에는 연구교수와 대학원생, 일반연구원, 학부연구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물속 미량오염물질의 거동과 제거 원리를 살피고, 새로운 소재와 수처리막을 개발하며, 실험 결과를 데이터와 연결해 처리 성능을 예측하는 연구를 이어갑니다. 소재를 만드는 일부터 실제 수처리 성능을 평가하는 일까지, 구성원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보태고 있습니다. 연구실 밖에서는 고려대·한양대·경북대·경희대·광운대 연구팀과 협력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소재와 공정을 개발하는 역량에 정밀한 분석과 성능 평가, 모델링 기술을 연결하면 개별 연구실만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에도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 이화 그린 페스티벌에서 토크콘서트를 진행하는 윤여민 교수(2024.11.)
    (우) 경희대, 경북대, 광운대, 이화여대 학술교류회(2026.02.)

    윤 교수가 생각하는 공동연구의 첫걸음은 ‘함께 풀 질문’을 정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심 분야와 강점을 살펴 해결할 문제를 정하고, 각 팀의 역할과 필요한 실험을 구체화합니다. 시료와 데이터를 공유한 뒤에는 결과를 함께 해석하며 다음 실험을 설계하죠. 이 과정에서 협력은 성과를 나누는 관계를 넘어, 서로의 판단을 믿고 의논할 수 있는 관계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낯선 절차를 묻던 대화가 이제는 다음 실험을 의논하는 대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착을 도와준 사람들 곁에서, 윤 교수 역시 함께 답을 찾아가는 동료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돌아온 한 사람, 이어지는 가능성

    Brain Pool+ 지원 아래 연구 기반을 마련한 윤여민 교수에게 한국은 ‘다음 도전을 시작할 곳’이 됐습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실험실 밖의 물환경입니다. 여러 오염물질이 섞여 있는 실제 물에서도 수처리막이 제 역할을 하는지 확인하고, 에너지 사용량과 장기 안정성, 부산물의 독성까지 살피고자 합니다. 실험 데이터를 머신러닝과 연결해 물의 조건에 맞는 처리 방법을 예측하는 연구도 그 여정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에서 시작할 연구에는 해외에서 쌓아온 인연도 힘을 보탭니다. 윤 교수는 미국 조지아텍의 Shane Snyder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과 협력의 기회를 넓혀, 국내에서 개발한 소재와 공정을 다양한 수질 조건에서 평가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과 함께 국경을 건너온 경험과 관계가 국내외 연구를 잇는 접점이 되는 셈이죠.

    앞으로는 한국을 연구의 기반으로 삼아 미량오염물질을 더 효과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처리하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 성과를 국제 공동연구로 확장하려고 해요. 한국 연구진의 빠른 실행력과 소재·공정 개발 역량에 해외 연구진의 수질 분석 및 평가 경험을 더한다면, 서로의 강점을 살린 공동 연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공동연구와 학생 교류를 통해 이 연결을 오래 이어가고자 합니다. 연구가 뻗어갈 내일을 그리는 한편, 다음에 올 연구자의 첫날도 떠올립니다. 자신 역시 고향에 돌아와 행정 절차와 생활환경을 다시 익혀야 했기에, 새로운 출발에 무엇이 필요한지 헤아리게 됐습니다. 좋은 정착 지원이 단순한 편의 제공을 넘어 연구의 질과 지속성에 직접 연결된다는 깨달음이죠. 부임 전 연구와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어려움이 생겼을 때 담당 부서나 동료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고 싶다는 바람도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완벽한 안내를 한 번에 제공하기보다, 필요할 때 편하게 묻고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제가 새로 오시는 연구자들에게 먼저 전하고 싶은 말이자 실천하고자 하는 지원입니다.

    과거 그가 돌아오는 길을 뒷받침한 지원은 이제 다른 이의 시작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고향에 닿은 그의 발걸음 곁에서 연구는 다시 세계로 향하고, 그 길 위에 새로운 만남이 기다립니다. 한 사람이 가져온 세계는 그렇게 또 다른 세계와 만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P.S. 아직 남은 이야기

    • 연구를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사실 요즘은 연구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웃음) 그래도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연구실을 나와 이화여대 캠퍼스를 천천히 걷습니다. 나무와 건물 사이로 달라지는 계절을 보고, 학생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붙들고 있던 문제에서도 잠시 눈을 떼게 됩니다. 그렇게 다른 풍경에 시선을 두었는데, 사무실에서는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도 있죠. 제게 휴식은 멀리 떠나는 일보다, 늘 걷던 길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는 시간입니다.

    • 연구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일상의 시간은요?

      아내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도 함께 산책하거나 가까운 곳에 다녀오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습니다. 연구와 일의 고민을 꺼내놓기도 하고, 한동안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죠. 그러면서 서로의 안부와 컨디션을 살피고, 바쁜 동안 놓쳤던 마음의 여유를 되찾습니다. 그렇게 함께 보내는 평범한 하루가 다시 연구실로 향할 힘을 줍니다.

      (좌) 아내와 저녁 시간을 보내는 윤여민 교수(2022.)
      (우) 윤여민 교수가 촬영한 이화여대 신공학관으로 가는 길(2026. 6.)
    • 한국행을 고민하던 자신에게 한마디를 건넨다면요?

      “잘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오길 참 잘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원래는 미국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은퇴한 뒤 아내와 돌아올 생각이었으니, 계획보다 약 10년 일찍 온 셈이죠. 이제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더 자주 만나고, 한국에서의 하루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은퇴 후에야 누릴 줄 알았던 시간을 새로운 연구와 함께 이어가고 있으니, 제 인생의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익숙한 삶을 떠날지 망설이던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너무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돼. 새로운 도전도, 가족과의 시간도 네게 생각보다 큰 기쁨을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