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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멸과 인문학적 산책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류석진 교수

인구절벽, 지역소멸이라는 어두운 용어가 유령같이 한국사회를 배회하며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현상에 대한 대증적 진단에 기초한 ‘대책’들이 남발되면서 ‘대책’의 효율성을 담보하기는커녕, 사회적 피로감과 회의감만이 증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은 근본 원인에 천착하기보다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사회정치적 과정에 대하여, 허시만(Albert Hirschman)의 이탈(exit)과 항의(voice) 개념을 차용해 지역소멸에 대한 인문학적 산책을 시도하여 본다. 이탈에만 과다한 관심을 기울이고 항의의 필요성은 등한시 하였다는 것이 이글의 핵심 주장이다.

허시만은 조직의 쇠퇴에 대한 구성원의 대응 방식을 이탈과 항의로 구분한다. 이탈이나 항의 모두 느슨해진(slack) 조직(의 운영)을 교정하여 팽팽하고 긴장된(taut) 상태로 회복(recuperaion)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탈은 “고객이 기업의 제품구매를 중지하거나 회원들이 조직을 탈퇴”하여 “그 결과 이윤이 하락하고, 회원수가 줄어들고, 경영진은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가를 알아내어 이를 고치는 방안을 강구”하게 만드는 시장적 수단이다.
“기업의 고객이나 조직의 회원이 불만 사항을 직접 경영진 혹은 상부기관에 토로하거나 또는 여러 가지 이의제기 방식을 통해 관심계층에 전달”하는 항의는 정치적 수단이다.

이탈과 항의는 상호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이탈과 항의는 적어도 두 가지의 상이한 결정이 동시간 대에 같이 진행되는 현상이다. 이탈은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의 결정이, 항의는 소리높여 싸울 것인지 조용히 있을 것인지의 결정이 포함되어 있다.

조직의 쇠퇴에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 이탈하지도 않고 항의하지도 않는 집단, 2) 항의하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집단, 3) 떠나지 않고 남아서 조직의 쇠퇴를 역전시키고자 내부에서 항의하는 집단, 4) 불만사항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이탈하는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원들의 각기 다른 대응과 조직의 회복을 이야기하면서, 허시만은 경쟁적 시장이 순탄하게 작동하게 하는 숨겨진 비밀에 대한 통찰력있는 논의를 전개한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둔감한(inert) 소비자와 민감한(alert) 소비자 두 층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둔감한 소비자(구성원)는 대상 회사와 조직에게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재정적 여유를 제공해주는 존재이다. 민감한 구성원은 조직에게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즉, 이탈과 항의의 적절한 조합은 원활한 시장의 작동을 위해 필수적이다.

지역소멸의 문제는 행정단위로서의 지자체이건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지역이건, 그 단위 조직의 쇠퇴에 대한 구성원들의 이탈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보다 낳은 취업기회와 사회/문화적 기반시설이 제공되고 있는 행정지역을 찾아, 기존의 단위에서 이탈하고 새로운 단위를 찾아 움직이는 유목민들의 존재가 지역소멸의 근본적 원인이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이탈만이 지배적인 대응 양식이고, 적절한 수준의 항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지역소멸에 대한 논의는 이탈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혹은 새로운 인구의 유입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표피적 현상에만 집중하였다. 이탈과 유입에만 몰두하고, 조직의 회복을 위해 필수적인 적절한 수준의 항의를 어떻게 유인해 낼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아예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새롭게 유입되는 인구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이다. 역으로 턴(turn)해서 지역/로컬로 이주하는 인구가 미약하나마 증가하고 있다. 이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을 허시만의 이탈/항의 개념을 통해 파악해 볼 수도 있다. 자신의 마을/로컬에서 이탈하여 대도시로 진출하였다가 이주한 도시에서의 삶의 질 하락 등에 염증을 느껴 다시금 대도시를 이탈하여 자신의 출생지역(U턴족) 혹은 대학생활이나 다른 관계를 가지게 된 지역(IJ턴족)으로 가는 집단은, 새롭게 이주한 지역/조직에서 나타나는 성과의 저하 등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새로운 유입민들은 자신과 새롭게 관계를 맺게되는 조직의 성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탈과 항의가 적절한 수준에서 조합되어야 하고, 이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민감한 소비자와 둔감한 소비자의 조합이 시장의 작동에서 중요한 이유와 같다.

위의 모든 논의가 마치 주민과 턴족들에게, 당신들의 선택의 결과이니 모든 것은 당신들의 책임이고, 이탈과 항의의 적절한 조합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지역적 차원에서 항의와 이탈의 조합이 적절히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자 하는 것이 허시만의 다소 복잡한 개념을 빌려온 이유이다.

일단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밉보이면 안되기에 조용히 ‘국’으로 먹고 떨어질 것인지, 내부 개혁 시도를 할 것인지, 소리높여 항의하고 이탈할 것인지, 조용히 이탈할 것인지 등등의 고민이다. 더 나아가 이탈/항의의 대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의 문제도 존재한다. 자신이 선택한 지역의 공동체를 대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지원조직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행정조직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등등의 대상 조직의 성격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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