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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제도
인문사회연구본부 사회과학단 윤비단장

우리는 흔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개인들이 모이면 훌륭한 조직이 생긴다고 여긴다. 학교에서부터 직장까지 도덕심을 고양하기 위한 온갖 교육과 캠페인이 벌어진다. 도덕심은 중요하다. 사람들이 부도덕하다면 좋은 조직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나 도덕 수준과 비례하여 조직이 좋아진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현대 조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한 제도이다.

현대 어느 도시의 교통사고 통계를 살펴보자. 2019년 한 해 동안 이 도시의 일일 평균 통행차량은 1058만 6천대였다. 일 년 동안 39,258건의 사고가 발생하였으므로 하루 평균 약 107.6건 정도의 사고가 발생한 셈이다. 그 가운데 총 250명의 사망자와 53,904명의 부상자가 생겼으므로 매일 0.68명의 교통사고 사망자와 147. 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1058만 6천대의 차량에 한명만 타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매일 1058만 6천명이 자동차를 이용하였는데 그 가운데 사망한 사람이 1명이 못 된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실제 자동차 한 대에 여러 사람이 탈 경우를 생각하면 놀라움은 더 커진다. 로또의 1등 당첨확률은 814만 5060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그 보다도 훨씬 낮다. 물론 부상자까지 포함한다면 좀 더 비관적인 기분이 든다. 오늘날 기술적으로나 엔진의 성능에서 엄청나게 개량된 자동차들이 사고를 일으킨다면 중상자들이 포함되었을 가망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사상자의 수는 낮다. 전원을 중상자로 가정하더라도 이 도시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들 중 집을 나서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든 입원이든 돌아오지 못할 확률은 0.0015%밖에 안된다.

방금 말한 이 도시는 서울이다. 앞에서 말한 통계에는 순전히 서울의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서울 거리에서 자전거, 도보 등을 이용하여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만일 이들을 포함한다면 서울 시내에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거나 다른 볼일을 보던 중 사고를 입을 확률은 더 낮아질 것이다.
욕구, 생각, 능력 등 모든 것에서 별로 닮은 것이 없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 우연히 같은 시간대에 도로에 나섰다는 것 이외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 서로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 리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는 1000만대가 넘는 자동차들이 충돌하지 않고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개인으로서 근본적으로 자율성을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여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질서가 작동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질서를 가능하게 했는가? 이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별 의도없이 모여 이루는 조화와 화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두가 남에게 양보 잘하고 배려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정말 우리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가?

필자가 보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하면서도 잘 짜여진 제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란 달릴만한 도로, 그 위에 설치된 신호등과 차선, 교통단속카메라, 길에서 눈에 띠기는 하지만 자주 마주치지는 않는 교통경찰(이들의 대부분은 단속보다는 신호조정의 임무를 맡는다), 신호를 어겼을 때 날아올 범칙금 고지서와 중대한 위반 시에 상당한 금전적 배상을 해야 하며 심지어 구치소나 교도소에서 갇힐 수 있도록 규정한 법률, 그리고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 받는 교통법규에 대한 기본교육을 말한다. 이 온갖 제도와 룰, 장치를 고안하고 설치, 유지 하는데 꽤나 비용이 들겠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는 자동차 1000만대가 다른 소통 없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각자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엄청난 성과를 생각하면 그리 큰 비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선진 대도시의 교통체계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경제적인가에 대해서 알려면 이 체계가 돌아가기 위해 개인에게 요구되는 작업과 에너지 지출이 얼마나 적은 가를 생각 해 보면 된다. 훌륭한 운전자가 되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전방을 주시하는 것, 신호와 차선을 잘 보고 지키는 것, 백미러와 옆 거울을 주기적으로 살피는 것, 운전에 방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아마 여기에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추가할 수 있겠다. 단지 여기에 나열된 몇 가지 작업을 각자가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체계가 돌아간다. 유난히 대단한 협동심을 갖출 필요도 없고, 유난히 대단한 이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교통체계가 돌아가는 것은 운전자들이 서로를 잘 알아서도 아끼기 때문도 아니다. 선팅을 짙게 한 자동차에 있으면 옆 자동차에 누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단지 정해진 기능을 익히고 수행하기만 하면 돌아가는 체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2019년 한해에만 66만 1000명이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교통체계에 편입될 수 있었다.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바가 낮기 때문에 이러한 체계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도 매우 낮다.

결국 이 거대한 대도시의 교통을 움직이는 것은 개인의 도덕심이 아니라 단순한 몇 가지 규칙과 그에 대한 보상 및 위반행위에 대한 그다지 복잡할 것 없는 제재, 여기에 그러한 규칙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따르게 하는 수준의 교육이다. 물론 여기에 시민 개개인의 높은 도덕심이 뒷받침되어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러나 높은 도덕심이 1천만 대의 자동차가 큰 사고 없이 움직일수록 해주는 핵심 동력은 아니다.

한국연구재단은 발전하고 있다. 사업평가부터 선정, 관리까지 부단히 제도를 발전시켜오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 필자는 여기서 한 번쯤 앞서 말한 도시 교통의 예를 떠올려 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종종 큰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개선점을 찾다보면 지나치게 많은 규칙들이 생겨나 서로 충돌하고 뒤엉키기는 일이 있다. 그러나 앞의 도시 교통에서도 보았듯 규칙은 쉬워야 하며 간단해야 한다. 그 규칙만 지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재단의 업무를 전혀 이해하지 않고도 주어지는 규칙만으로 편히 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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