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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 교육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장, 독어독문학과 강창우 교수

한 시대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고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옳거나 더 나을 확률이 매우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이익을 감수하는 소수의 반골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다양성 유지에 기여하는데, 다양성이야말로 자연과 인간 사회 발전의 전제이므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소수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은 시류를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해왔고, 대학 사회에서 인문대학은 대세에 딴지를 걸어 미움받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왕 내친걸음이니 딴지 한 번 더 걸어보려고 한다.

지금 대학의 연구와 교육에서 대세는 ‘융합’이다. 한때는 학제적 연구라 했고, 혹자는 통섭 학문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융합이다. 연구는 융합적으로 해야 하고, 교육은 융합적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사실 학문은 융합적으로 하는 것이 기본값이다.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하는 것도 학자로서의 훌륭한 미덕이지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천착하다 보면 여러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대문호 괴테는 색채론으로도 일가를 이루었고, 다산 정약용은 지리학과 의학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학문의 발달과 더불어 세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같은 전공 안에서도 세부 전공이 다르면 소통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지금은 이에 대한 반작용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교육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융합 교육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서울대학교도 이 시대적 요구에 맞춰 대학 교육의 목표를 글로벌 융합인재 양성으로 설정하고, 전공 간 벽을 낮추는 융합형 교육체계 도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규 교원 TO 배정에서도 융합적 연구와 교육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인문대학도 다수의  협동과정과 연계ㆍ연합전공을 개설하고, 디지털 신기술 인재양성 혁신공유대학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융합 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디지털 인문학을 교육과 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처럼 교육 혁신을 위한 노력이 융합 교육에 집중되고 있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융합 교육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따라서 지금은 융합을 향해 매진할 때지만, 한 번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 길이 맞는지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얼마 전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인사담당 임원으로부터 “우리는 도메인 지식을 충분히 갖춘 인재가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던 일이다. 그 임원에 따르면, 회사가 도메인 지식을 갖춘 인재들을 모아서 융합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과 통합적 사고력을 갖춘 인재를 필요로 하고, 이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방법이 여러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게 하는 융합 교육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퇴임하신 인문대의 어느 교수님이 한 분야를 깊이 이해하면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도 쉬워진다고 하셨던 말씀이나 제2외국어 학과들처럼 해당 전공에 대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현실은 인문대학 졸업생들이 취업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해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는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이런 융합 교육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융합 교육으로 가는 길목에서 인문학자의 습관처럼 한 번 더 회의하면서 떠오른 단상 몇 가지를 적는다.

첫째, 융합을 장려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융합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문제다. 학생들의 시간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분야를 골고루 잘하기는 어려우며, 이수학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쪽 분야에 비중을 두면 다른 쪽 분야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즉 여러 분야를 공부하려면 한 분야를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 쉽지 않으며, 융합 교과목 하나를 필수로 지정하면 다른 쪽에서 한 과목 적게 듣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분야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싶은 학생에게 융합 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한 분야에 깊이 천착하는 인문학자에게는 융합 연구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교육 없이 융합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과연 융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융합도 과유불급인가?

둘째, 융합 교과목이 융합 교육의 전제는 아니다. 융합 교과목을 개발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과거에도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대학 교육은 한 가지 주제에 대하여 깊이 탐구하는 수업이 바탕을 이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융합 교육은 개별 교과목이 모두 융합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다양한 ‘비융합적’ 수업을 듣고 융합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이때 교수는 학생들이 제각기 추구하는 융합에 대한 설계를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학생식당에서 저렴하게 제공되는 메뉴 가운데 몇 가지 재료를 한 그릇에 넣어서 끓인 국밥(Eintopf)이 있는데, 비유하자면 융합 교육은 ‘국밥’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재료들 가운데 식성에 따라 몇 가지를 골라서 학생이 직접 만드는 비빔밥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셋째, 편식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백과사전식 지식을 갖게 되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여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려다가 자칫 어느 한 분야에 대해서도 고등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해야 할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미 전공이수학점이 30학점대로 낮아졌는데, 이것을 더 낮추려는 시도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전공지식을 충분히 습득하는 데 지장이 없다면 상관없지만, 학과나 전공에 따라서는 기존의 전공이수학점도 부족할 수 있다. 따라서 복수전공이나 다전공을 장려하는 것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 전공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여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조금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 단상 하나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것은 융합 이후 혹은 융합의 대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과 교육의 패러다임은 계속 바뀐다. 아직 융합이 제자리를 잡지도 못했는데 그 이후를 생각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겠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은 지금까지 현실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그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흔히 하는 말로 플랜 B는 항상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융합 연구와 융합 교육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인문학자는 탁주 한 사발을 마시며 딴생각을 좀 하는 것도 꽤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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