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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思惟)의 서재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고 싶은 당신께
「쓰기 이론」
연세대학교 정희모 명예교수

한 권의 책에 담긴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 활자 속 유영하는 저마다의 이야기는 일상에 전환점이 되곤 하는데요. 사유(思惟)의 서재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으로 탄생한 우수학술저서 한 권과 저자 인터뷰,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질문거리를 곁들여 전합니다. 책 너머의 저자, 저자 너머의 빛나는 사유가 담긴 서재에 들어오세요!

우리는 매일 문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때로는 짧은 메모 한 줄로 하루를 기록하기도 하죠. 하지만 AI가 순식간에 문장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면서 글쓰기는 단순히 기술의 영역으로 여겨지곤 하는데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쓰기 이론 : 인지주의 관점과 텍스트 관점』은 글쓰기 이론과 내부 원리를 탐색하면서 글쓰기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글쓰기는 단순히 문장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조직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죠. 이번 사유의 서재에서는 글쓰기의 본질을 함께 살펴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의 힘에 관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정희모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작문학회, 대학작문학회, 한국리터러시학회 회장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주로 글쓰기 이론 및 교육을 연구했으며 글쓰기에 관한 학술적, 대중적 저술 작업을 해왔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꾸준히 가르쳐 왔고, 글쓰기 이론에 관한 세미나를 지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글쓰기 교육과 협력학습」, 「글쓰기 교육의 이론적 탐색」, 「창의적 생각의 발견」, 「문장의 비결」 등이 있으며, 공저로 쓴 글쓰기 교재로 「글쓰기」, 「모든 사람을 위한 과학 글쓰기」가 있다.

#01 책을 쓰다 ‘글쓰기’라는 세계

  • 정희모 교수님 반갑습니다. 한국연구재단 웹진 독자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가 퇴직한 이후 명예교수로 있는 정희모입니다. 전공은 현대 문학과 쓰기 교육으로, 2000년 이후부터 쓰기 이론과 쓰기 교육에 관한 연구에 집중해 왔는데요. 당시는 우리나라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대학 교육에 이를 적용하려고 시도하던 시기입니다. 미국 대학이 20세기 초부터 쓰기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에 비해 한참 늦은 감은 있지만요. 이후 한국 대학에서도 글쓰기에 관한 다양한 과목이 생기고 연구자도 늘어났습니다. 지금은 AI의 등장으로 쓰기 교육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있지만, 곧 새 돌파구를 찾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글을 쓰고 텍스트를 만드는 건 인간 사유의 본질과 정체성에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 「쓰기 이론 :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내부 원리의 탐색」은 쓰기 연구의 역사와 핵심 이론을 집약한 결과물입니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쓰기 이론’을 정리하게 되셨나요? 책을 기획한 것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쓰기 이론에 관한 연구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많지는 않았는데요. 쓰기 이론을 공부하면서 대강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총론적인 책을 쓰고자 기획했습니다. 대부분 학문이 그렇겠지만 쓰기 이론도 철학,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 등 다양한 외부 이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루는 범위도 넓은 데다 분량도 상당히 많죠. 이런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본 저서는 한국연구재단의 저술출판지원사업을 통해 번역,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업 지원 배경과 출간까지의 여정이 궁금합니다.
    책을 기획하게 된 시기에는 글쓰기와 관련된 모든 부분을 포괄한 책을 쓰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언어와 쓰기 이론과의 관계, 쓰기 이론의 역사. 쓰기 과정 이론, 독자·장르·담화공동체 이론, 문장과 문법, 텍스트 이론, 쓰기 평가 방법, 디지털 리터러시 등 가능한 많은 사항을 포함하여 본문을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고, 이를 지원해 줄 시스템도 필요했죠. 저술출판지원사업에 지원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에 계획했던 것을 모두 이루는 건 쉽지만은 않더라고요. (웃음) 한 권의 책에 모든 내용을 담기에는 분량이 많고, 정리하기에 다소 벅찬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기 이론 중에 쓰기 교육과 관련된 내용으로 축소해 작성하게 됐습니다.
  • 글쓰기 연구 분야 가운데 인지주의, 텍스트 이론을 중심으로 책을 구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지주의와 텍스트 이론을 책의 주요 항목으로 정하게 된 데는 이 내용들이 쓰기 교육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쓰기 이론은 쓰기 교육과 분리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쓰기 이론의 연구는 주로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대다수는 ‘쓰기를 배우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쓰기 이론은 쓰기 교육과 연관시켜 연구할 때 큰 의미를 지니고, 연구 가치도 크다고 생각해요. 인지주의 이론은 사람이 글을 쓸 때 머릿속에서 어떤 사고 과정이 일어나는지를 탐구합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글을 쓰는 과정을 내면적으로 추적한 연구가 많은데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쓰기 목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아이디어를 어떤 방법으로 생성해야 할지,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전개해야 할지, 어떻게 고치고 다듬어야 할지에 관한 일련의 글쓰기 과정을 분석한 논문들이 있죠. 그리고 이런 논의가 실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요. 아울러 텍스트 이론은 한 편의 글이 주제와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형식과 구조를 띠는지 분석하는 논의입니다. 이 또한 학생들이 자신이 쓴 글을 구조적으로 따져보고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두 이론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글쓰기를 조명하면서, 실제 쓰기 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02 책을 읽다 생각이 문장이 되는 순간

  • 「쓰기 이론 : 이론의 역사적 전개와 내부 원리의 탐색」은 쓰기 이론의 역사와 핵심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짧게 설명해 주세요. 이 책은 전체 4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는 과정 중심 이론을 중심으로 쓰기 이론의 역사를 설명합니다. 쓰기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쓰기 이론의 태동과 전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초창기 쓰기 연구의 전개 과정과 과정 중심 이론의 등장을 중심 문제를 다룹니다. 2부는 쓰기 이론에서 사회적 관점이 등장하는 배경과 이에 관한 논의를 다룹니다. 쓰기에 있어 사회적 관점은 인지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납니다. 인지(마음)보다는 외부 환경과 맥락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대화주의 이론, 담화공동체 이론, 독자이론)을 다루고 있죠. 3부는 결속성과 응집성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결속성은 ‘언어 형식’을 통해 문장을 연결하는 것을 말하고, 응집성은 ‘맥락과 의미’를 통해 문장을 연결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우리가 언어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를 분석하는 것인데, 쓰기 교육에서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입니다. 마지막으로 4부는 화제 구조 분석으로, 한 편의 텍스트가 어떤 구성 방식과 구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분석하는 이론을 담았습니다.
    • 1부 과정 중심 이론의 등장과 쓰기 이론의 역사
    • 2부 쓰기 이론에서 사회적 관점이 등장하게 된 배경
    • 3부 결속성과 응집성
    • 4부 화제 구조 분석
  • 책에서 다루는 인지주의 이론은 글쓰기를 내면의 사고 과정임을 강조하는 반면, 대화주의 이론은 사회적 관계망, 맥락 속 글쓰기가 탄생한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두 관점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쓰기 이론에서 인지주의는 인간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를 인간 내면의 문제로 보고, 이를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연구 관점입니다. 물론 글쓰기를 인간 내면의 문제로 보았다고 해서 글쓰기에 담긴 외적 환경이나 배경의 문제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외부 환경보다 인간 사유 형식과 표현 과정의 문제가 우선한다고 본 셈이죠. 그래서 인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글을 쓰기 전(또는 쓰는 과정) 필자 생각과 표현 방식을 관찰하고 추적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이에 반해 대화주의는 바흐친의 관점을 쓰기 연구에 도입한 것인데요. 바흐친은 인지주의자와 달리 언어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중시하고,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 상호작용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바흐친의 논의에 따르면 텍스트의 의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어떤 단어든 홀로 서 있는 것이 없으며, 서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성을 갖는다고 보고 있죠. 대화주의는 언어가 상호적이며 소통적 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해 인지주의의 개인적 내면을 넘어설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논의는 자연히 글쓰기에서 대화와 협상, 소통을 중시하는 이론들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 인지주의 인간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를
      인간 내면의 문제로 보고,
      인지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탐구
    • 대화주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중시하고,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
  • 텍스트 이론에서 결속성과 응집성은 글이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로 기능하는 데 있어 핵심 요소입니다.
    결속성과 응집성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결속성(cohesion)과 응집성(coherence)에 관한 논의는 텍스트에서 문장과 문장이 어떻게 연결되어 의미를 만들어 내는지 살펴보는 이론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는 모범생이야. 그는 공부도 잘하고, 착해”라는 문장이 있다면, 앞의 문장에서 ‘철수’와 뒤 문장의 ‘그’라는 어휘가 서로 연결되어 두 문장이 철수에 관해 어떤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텍스트에서 어휘를 통해 문장의 의미를 연결해 가는 것을 결속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다른 예시로 “날씨가 너무 더워. 에어컨을 틀어줘.”라는 문장을 보면 두 문장을 연결하는 어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우면 에어컨을 켠다는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두 문장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이처럼 경험과 맥락을 통해 의미가 하나의 흐름으로 형성되는 것을 응집성이라고 합니다. 쓰기 교육에서 결속성과 응집성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말(구어)이 상황성의 산물인 것처럼, 글(문어)은 문자 맥락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은 때로는 언어 형식을 통해, 때로는 그것이 주는 맥락을 통해 의미를 전달합니다. 문장이 어떻게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그리고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결속성
      (cohesion)
      텍스트에서 어휘를 통해 문장의 의미를 연결
      (예) “철수는 모범생이야. 그는 공부도 잘하고, 착해”
    • 응집성
      (coherence)
      텍스트에서 맥락과 경험을 통해 의미를 연결
      (예) “날씨가 너무 더워. 에어컨을 틀어줘.”

#03 책을 건네다 쓰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 종종 ‘사흘’, ‘심심한 사과’, ‘중식 제공’ 등 표현을 둘러싸고 문해력 논란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의 어휘 실력은 우려스러울 정도입니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고 있거나. ‘완강하다’는 ‘완전히 강하다’로 이해하는 등 일일이 사례를 들 필요가 없겠지요. 심지어 ‘조건을 만족하는 값은~’, ‘시발점은~’, ‘일정한 농도는~’과 같은 어휘를 모르니 시험을 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렇다 보니 문해력 부족은 국어 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의 문해력이 약해지는 현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영상, 인터넷, AI의 등장으로 책과 같은 문자 매체를 접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죠.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어휘 능력과 문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의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휘와 문장 구조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과정이 되기도 하거든요. 책을 많이 읽은 학생이 문장력이 좋고, 사고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여러 실험에서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렇게 독서를 통해 얻은 문해력과 사고력은 다른 과목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죠.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기보다는 종이책으로 에세이와 소설을 읽으면서 사색과 상상의 세계를 경험해 보기 바랍니다.
  • AI 시대를 사는 독자들이 「쓰기이론」을 통해 얻어갔으면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요? AI 시대가 되면서 이전만큼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해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이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이를 정리해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글쓰기가 아니라면 내면에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생각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AI가 등장해 쉽고 빠르게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생각과 경험, 오랜 숙고 끝에 얻은 통찰까지 AI가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무엇을 말할 것인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니까요. 우리의 생각은 이리저리 흘러가는 속성이 있어 단번에 정리하기에 부족합니다. 글은 이런 생각들을 붙잡아 깊이 있게 정리해 주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이 그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기는 인간의 본연적 속성이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오랜 시간 학습하고 다듬어야 합니다. 이 책 󰡔쓰기 이론󰡕은 잘 표현할 방법에 관한 배경 이론을 배우는 책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이 단순히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는 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 아래, 즉 쓰기 교육 밑바탕에 있는 이론들을 살펴보는 책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양서나 대중서가 아니라 학술서입니다. 이 책은 쓰기 교육을 실행하는 교수자나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운동선수도 기초 이론이 튼튼하면 훈련과 실제 경기에서 효과를 보듯이 이 책도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방법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딱 한 문장에만 밑줄을 그어 선물할 수 있다면 어떤 문장을 고르고 싶으신가요? 그 문장에 담긴 의미와 이유도 함께 들려주세요. 제가 고른 문장은 말과 글의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통상 학자들은 말은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것, 반면에 글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봅니다. 말이 직관적이라는 건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즉각적인 반응에 의한 경우가 많고, 글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생각할 여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겠죠. 가끔 자신도 모르게 급하게 내뱉은 말로 얼마나 고생하는지 생각하면 말과 글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지실 겁니다. 글은 우리가 생각하고 사유하는 데 있어 긍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쓰고자 하는 대상을 객관화시켜 분석할 수도 있고 찬찬히 평가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글쓰기가 지닌 시간적, 공간적 거리감은 세계를 대상화하고, 나 자신을 객체화하는 데 유리합니다. 캐나다 심리학자 올슨(Olson)은 글이 ‘문장의 의미’와 ‘의도된 의미’, ‘해석’ 사이의 차이를 허용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필자는 직접 독자를 만들 수 없고, 오로지 문장의 맥락 안에서만 이해해야 하기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줄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글은 필자에 따라 복잡한 추상적 사유를 담을 수 있고. 독자들이 그것을 다양하게 해석할 자유도 허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사회에 대한 풍부한 인식, 개인 삶의 깊은 인식과 성찰, 자기반성이 가능한 기술입니다. 이렇게 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연적인 정체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AI 시대에 글쓰기가 지닌 이런 다양한 매력과 장점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마지막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근 AI에 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 2022년 OpenAI의 ChatGPT가 나왔을 때 미국의 학자 스테븐 마르케(Stephen Marche)는 “대학 에세이는 죽었다.”라는 글을 발표해 큰 충격을 준 바가 있는데요. 아마 이 분이 새롭게 나오는 AI 버전들을 본다면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요즘 제공되는 AI 서비스들을 보면 놀랄 만큼 글을 잘 씁니다. 이전에는 쓰기 교수자들이 학생들의 과제에서 AI를 이용한 글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겁이 나는 것은 학생들이 AI를 글을 쓰기 위한 협력자로 보지 않고 자신의 과제를 모두 ‘아웃소싱(사고의 외주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사유 능력이나 인지 능력이 약화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죠. 영상과 디지털, AI가 점령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인간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뇌과학자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가 말했듯이 인간에게 읽기와 쓰기 능력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그녀는 문해력이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후천적 성취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영상 매체와 디지털로 인해 이런 능력을 하나씩 잃어갈 때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지 두렵다고 말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읽기와 쓰기는 더디지만 인간다움의 정체성을 읽지 않을 마지막 보루이기도 합니다. 깊은 사색을 가능하게 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도록 돕습니다. 부디 독자 여러분께서도 바쁜 일상 속에서 책을 읽고, 자신의 문장을 써 내려가며,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시간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가장 소중한 힘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