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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퇴직생활을 위하여
전북대학교 이종민 교수

우리 사회는 대학교수에게 많은 것을 보장해준다. 혼자만의 연구실 공간, 꽤 높은 안정적 수입, 사회적 신뢰와 그에 따르는 여러 직함들, 그리고 언제든 도움 줄 준비가 되어있는 조교 등!

하여 퇴임 후 홀로서기가 만만치 않다. 꼼꼼한 준비와 상당 기간의 훈련이 요구되기도 한다.

홀로서기의 기본 정신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라 할 수 있지 않은가?’(人不知不慍 不亦君子乎)다. 말하자면 군자 흉내 내기!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남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 더불어 남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쉽지 않은 경지다.

20여 년 전 감히 퇴임 후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매실과 은행나무를 심으면서부터 매일 연습 삼아 되새김한 화두다. 혼자 즐길 수 있어야 남 탓하지 않고 세속의 판단에도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때부터 퇴임 준비는 시작되었다. 말이 좋아 전원생활이지 시골에서의 삶은 상당한 근력의 노동을 요구한다. 썩은 나무 계단도 수선해야 하고 야외 의자도 손수 만들고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매실나무 전지하는 데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매실주나 매실청 담그는 일도 남의 손을 빌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조금이라도 근력이 남아 있을 때 시작하여 몸에 익숙해지게 해야 한다.
책 읽고 음악 감상하고 영화 즐기는 일, 홀로서기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어쩌다 보니 이를 위한 서재 공간을 두 곳이나 마련했다. 화양모재(華陽茅齋)와 유연당(悠然堂)! 멋을 부리느라 도연명의 시 구절(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로 주련도 걸고 추사 글씨로 소망을 담은 대련(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을 나무에 새겨 걸어놓았다.
오래 준비했다고 퇴임 연착륙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잔머리’가 필요하다. 9박 10일 제주도 부부여행은 그렇게 기획되었다. 여행 자체가 스스로나 가족에게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설렘으로 퇴임의 허전함을 잊을 수 있다. 장기간의 여행으로부터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차피 일정 정도의 적응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퇴임생활 시작이 한참 전 일이 되고 만다.

홀로서기의 시작은 ‘혼밥’?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 의외로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연습 부족에 쓸데없는 남들 눈치 보기가 발목을 잡는다. 혼자 식당을 찾는 것도 그렇지만 집에서 혼자 챙겨 먹는 것도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어지간한 음식 장만하기는 인터넷에 다 나와 있지만 몸에 밴 의존성 게으름이 손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더 중요한 홀로서기는 교수 본연의 전공영역과 관련된 것이리라. 원래 전공과목은 불가피하게 마련된 편의적 분업의 산물이다. 새로운 사회의 주권자로 성장한 시민계급은 옛 귀족(혹은 군자)처럼 전인교육을 받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여러 전공 분업자들이 모여 ‘보이지 않는 손’에 기대며 판단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근대 대학교육은 그런 수용에 부응하여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업은 여러 전공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대학 사회를 벗어나면 무기력해진다. 실제로 전공(영미시) 관련 외부 강의 요청은 40년 교수생활 중 딱 한 번, 영어전문도서관에서 온 것뿐이었다. 퓨전이나 경계선 넘기를 통해 사회적 욕구에 상응하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영역을 마련해 놓아야 건강만 챙기는 퇴임생활을 벗어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나 통섭(consilience)의 노력은 박사학위를 통해 독립적 연구 자격증을 획득한 이후부터 바로 시작해야 한다. 슬기로운 퇴직생활을 위해서라도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일상의 화두로 되뇌며 스스로를 챙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퇴임을 앞둔 2월이나 7월, 연구실 복도에 수많은 서적을 쓰레기처럼 버리게 된다. 스스로에게도 참담한 일이지만 후학들이나 제자들 보기에도 참 민망한 일이다.

홀로서기의 완성은 어쩌면 대학 연구실과 같은 독립적 공간을 확보하는 데 있을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고 꼭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게 가능하다면 앞의 홀로서기는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그 공간을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생산적인 활동이 없으면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평소 지자체나 지역사회, 지역 주민들과의 지속적인 연대가 전제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혹은 기여의 경력이 있어야 꿈꿀 수 있는 일이란 말이다. 평소 자기 전공에만 함몰되지 않고 통섭의 정신으로 노력하면 지역사회와 연대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꼰대처럼 교수의 권위나 전문성을 내세워 대접 받기를 기다려서는 꿈꿀 수 없는 일이다. 평소 사회로부터 능력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완주인문네트워크’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인문학 강좌를 기획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런 의미에서 큰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퇴임은 홀로인 존재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할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퇴임 기념으로 펴낸 3권의 책은 바로 그런 마음가짐의 산물이라 하겠다.
퇴임을 오히려, 혼밥과 혼술, 혼자만의 산책,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 등을 위한 기회로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즐겨보는 것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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