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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감싸는 융합
박재민 건국대학교 교수

지식의 융합이란 무엇일까. 분명 이 곳에 감추어진 놀라운 뭔가가 있다는 추측은 오래됐다. 개별 학문의 진화가 잦아들 즈음, 지식의 진화는 그 돌출된 지형들 사이를 메꾸는 것이 될 거라 생각해 왔다. 그러니 나서 시도를 해봄직 했다.

생명공학하는 친구와 학생을 교류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생명공학이란 원 지식에 기술경영이 도구를 쥐어주면 어떻게 될까.’ 결론을 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 지식 기반 위에 다른 지식을 쌓아보라는 건 가당치도 않은 주문이란 것을. 자신도 서보지 못한 지형 위에 누군가를 세우고, 이제 두 가지 모두 배웠으니 멋진 새 지식을 만들어 보란 주문은 무지한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지식의 거리를 초월한 융합이 가당하기나 한 것일까. 하지만 혹 온전히 모든 것을 녹여내려 발버둥치는 대신 원래의 지식을 감싸는 그런 방식이라면 가능할까. 원래의 지식을 더 풍요롭게 해석하고 그 원리를 관통해 설명해 내는 통로로 삼는 것이라면...

과연 그럴까. 누군가는 혁신의 원천을 통찰력이라 한다.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그런 통찰력의 ‘통로’에 몇 가지가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는 이례적 수치라는 것이다. 평균치에서 벗어난 수치는 가치 있는 직관을 감추고 있다. 다른 하나는 동떨어진 곳에서 원리를 착안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럴듯한 기업사례도 있다. 이들 원리를 묶어 ‘긍정적 변종’이라는 개념도 마련해 뒀다. 매번 상식과 정설만 따르는 대신 다른 대안은 없는지 물어 보라는 조언도 한 마디 준비했다.
하지만 이 날 내가 찾은 가장 그럴듯한 사례를 ‘고흐 위작 찾기’였다. 과학시리즈 NOVA는 위작이 많기로 유명한 반 고흐 작품 6점을 내놓고 `위작 찾기`를 진행했다. 참가팀에 주어진 시간은 1주일. 대부분 알려진 전략을 택했다. 고흐와 색, 스타일 차이는 없나. 그가 즐겨 쓰던 구도인가. 안료와 캔버스에 이상 점은 없나.
하지만 한 참가자의 선택은 ‘주저함’이었다. 가설은 이랬다. ‘위작은 진품에 비해 붓질 횟수가 많을 것이다.’ 고흐라면 그 붓놀림에 거리낌이 없었겠지만 위작엔 비슷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주저함이 끼어들 테다. 그럼 붓질은 짧아지고, 여러 번 덧대어진다. 이들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위작을 구분해 냈다. 알려진 원리와 드러난 것을 믿는 대신 숨어 있는 `흔적`을 찾는 것으로.
잭 웰치의 ‘벽 허물기’과 ‘우리 것이 아니야(not invented here)’라는 생각의 경계(境界)에 대한 경계(警戒) 그리고 그 경계선에 효율성과 생산성이 숨어 있다는 주장을 설명하는데 “맙소사. 당신이 찾았다는 그 소수의 공식은 전자의 에너지 준위의 공식이라고요”란 탄성이 터져 나온 어느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우연한 만남’ 만큼이나 극적이고 설득력 사례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기업 사례들과 비교해도 말이다.

경영이란 만일(if)/그렇다면(then)란 논리모형이라는 것에 실상 사례집이 담은 터론토국제영화제 보다 내가 가본 적 있던 일일이 고기를 구워 잘라내 놓는 어느 마포의 고깃집 얘기가 더 나았다.
이 고깃집의, 그 가격에 감지덕지할만한 서비스의 뒤엔 주인장의 셈법이 있었다. 그는 손님에게 굽기와 가위질은 맡기고 인건비를 아끼는 대신 붐비는 저녁 시간대 ‘테이블 당 회전율’을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에선 연탄불도 아래, 위 두 장을 다 태웠다. 이곳 고기가 맛있고 가격이 싼 것도 ‘회전율이 높으면 수익은 높다’란if-then이란 초점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플랫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데는 “아이폰의 성공은 아이폰과 운용체계(OS)를 애플리케이션(앱) 개발자와 소비자가 만나는 플랫폼으로 삼았다”는 설명이나 그 원리의 첫째는 개방성이고, 둘째로 네트워크 효과며, 셋째로 사용자와 공급자 조합이란 설명보다 천리마를 찾아 사방으로 관리를 파견했던 어느 황제의 고사가 더 어울릴 법했다. 천리마를 찾아나선지 한참 지나 관리 하나가 돌아왔다. “폐하, 수소문 끝에 천리마를 찾았는데 이미 죽은 지 오래였습니다. 황금 500근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 뼈를 구해 왔습니다.” 황제는 대노했다. 관리는 정색하며 답한다. “저를 벌하시려거든 잠시 미루신 후에 하십시오.
이제 폐하가 천리마를 원하고 후한 값을 치를 것임을 온 천하가 알게 됐으니 만일 천리마가 이 세상에 있다면 곧 보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를 벌하는 것은 이 귀한 책략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전해 들었던 프린스턴고등과학원에서 벌어졌다는 한 장면을 가끔 상상해 본다. 푸앙카레 추측을 풀었다는 소문에 그를 초대한다. 기라성 같은 수학자들로 채워졌을 좌중이 조용한 가운데 그가 풀이를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좌중이 웅성댄다.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그레고리 페렐만의 풀이가 미분기하학에서 열역학으로 넘어가 팽창과 수축을 논하는 그 놀라운 통섭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물론 이런 용해의 순간을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을 나눈 경계 사이에선 아직 꿈꿀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단지 원래의 지식을 감싸 안아 더 깊은 통찰력을 찾아나선 이 ‘미천한 시도’를 융합이라 부를 수 있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 봄직도 싶다. 다시 한번 더.

언젠가 전해 들었던 프린스턴고등과학원에서 벌어졌다는 한 장면을 가끔 상상해 본다. 푸앙카레 추측을 풀었다는 소문에 그를 초대한다. 기라성 같은 수학자들로 채워졌을 좌중이 조용한 가운데 그가 풀이를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좌중이 웅성댄다.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그레고리 페렐만의 풀이가 미분기하학에서 열역학으로 넘어가 팽창과 수축을 논하는 그 놀라운 통섭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물론 이런 용해의 순간을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을 나눈 경계 사이에선 아직 꿈꿀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단지 원래의 지식을 감싸 안아 더 깊은 통찰력을 찾아나선 이 ‘미천한 시도’를 융합이라 부를 수 있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 봄직도 싶다. 다시 한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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