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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의 불평
박상준(포항공과대학교(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융합문명연구원 원장)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즈음, 대학 동기 하나가 내게 질문을 했다. 너의 논문이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중학 시절 이래로 그저 문학이 좋아서 국어 선생님, 국문학 교수가 되고자 했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자의 길을 걸으면서는 나름대로 꿈을 이뤘다고 자부한 셈이었던 터라, 동기의 그 질문은 매우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국문학도의 길 인문학을 전공하는 인생 경로를 선택한 것 자체가 경제적인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며 바로 그만큼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했던 까닭에, 그러한 선택이 사회 현실에 비추어 무슨 실제적인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것 같다.

정리해 보면, 삶의 자세를 선택하는 차원에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자에게 그러한 선택의 실제적인 결과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제기되어, 서로 간에 초점이 어긋나 버렸다 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내 생각이 여전한 까닭이다.

4차 산업혁명이 바꿔 놓을 미래가 이야기되고 경제 제일주의의 풍조가 만연한 우리 시대에 인문학자로서의 삶을 견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순수예술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가장 참여적이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말을 끌어오지 않는다 해도, 신자유주의와 과학만능주의의 물결이 팽배하여 정신문화의 가치가 흐려지고, 진영 논리에 의해 공론장에서 말의 의미가 제대로 서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자로 사는 것은, 세상과의 불화를 체현하는 만큼 사회적인 의미를 띠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문학자라는 존재 자체로는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세상과 겪는 불화를 표현하는 만큼 곧 세상에 대한 불평을 밖으로 드러내는 만큼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러한 의미를 지향하는 경우, 세상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기에 불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인문학자의 불평은 대체로 전 사회적인 양상을 띤다. 자신의 서재를 가득 채운 책들이 보이는 다양한 전공만큼, 그의 불평은 사회의 온갖 부면을 향하며 그 논의 또한 다채롭기 그지없다. 경제 제일주의적인 세태와, 과학만능주의의 풍조, 공론장의 붕괴, 세계의 정치 질서 등이 모두 인문학자의 관심사에 해당한다.

인문학자가 제 전공을 넘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불평조로 이야기를 하면, 대개의 경우 그의 발언은 무시되고 그의 의도는 오해되기 십상이다. 전문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말한다고 다른 전문가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하고, 인문학이 홀대받는 상황 탓에 매사에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고 일반인들에 의해서까지 폄하되기도 한다. 세상에 대해 불평하는 인문학자를 사갈시하는 이들이 인정하는 인문학자란, 세상의 일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 고전 텍스트들에 파묻혀서 자기들만의 논의를 세밀하게 펼치는 서재 속의 학자이다. 그와는 달리 제 분야를 넘어 온갖 책을 읽고 그에 근거하여 세상을 파악하며 그 결과로 불평을 말하는 인문학자는 주제넘은 존재일 뿐이다.

세상에 대해 불평을 말하는 인문학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세밀하게 나뉜 분과 학문 체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맹목의 소산이거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인문학자가 처한 불행한 상황을 주목하여 그의 발언을 상황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는 단순한 사고 탓이다. 전자는 사르트르식으로 말할 때 지식인이 아닌 지식 전문가 수준에 갇힌 경우이고, 후자는 스스로가 경제적 가치를 유일의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두 경우가 공유하는 것은, 인문학자가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지를 모르는 무지이다.

인문학자는 인간성의 풍부한 발양을 추구한다. 인간이란 경제적 동물로도 일하는 기계로도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확인되는 고귀한 인간성의 다양한 면모들과 근대의 기획이 제시한바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 주체라는 이상적인 인간형이 그들 믿음의 원동력이다. 물론 이는 실제의 인간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추구되어야 할 이상적인 인간형이어서, 인문학자의 활동은 그 본연에 있어서 현실 너머를 향하게 마련이다. 현실 속의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시선이 삐딱해지는 것은 이런 까닭에 당연하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대중을 경성하고, 자기 착취에 이르기까지 성과를 내려 하는 경제적 인간을 경계하며, 유체이탈식 화법이나 ‘내로남불’식 행태를 보이는 소위 사회 지도층을 비판하는 것 모두, 인간에 대한 인문학자의 사랑, 세상에 대한 인문학자의 관심에 기인한다. 그의 사랑과 관심은 개인과 집단에 있어 인문학자가 지향하는 것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그것은 주체적인 정신의 자유와 유적 존재라는 이념의 실현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어 줄 핵심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된 적이 없는 이상이다. 그런 만큼, 인문학자의 지향과 그에 근거한 비판적인 발언은 실제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불평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인문학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평을 계속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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