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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부터 우주까지
“국가 미래 있다면 어디라도”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 유지범 본부장
(성균관대학교 신소재공학부 교수)

과학기술은 경제와 안보의 일관된 뿌리이자 패권경쟁의 출발점입니다. 3년여 간의 코로나 사태, 전 지구적 기후변화, 4차 산업혁명 시대 도래와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 세계의 권력지형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게 될 차세대 리더십 역시 과학기술 주도권 다툼에서 옥석이 가려지게 될 게 분명합니다. 이에 따라 미국, 중국, 일본, EU 등은 앞 다퉈 7~10개 내외의 미래기술에 연구개발 투자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해 말 ‘10대 국가 필수전략기술’을 선정해 과학기술 주권 확보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중 대부분이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의 소관 분야입니다. 유지범 신임 국책연구본부장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유지범 신임 국책연구본부장의 집무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사무실 한쪽 편 가지런히 놓인 여행용 트렁크와 보스턴백입니다. 올해 1월 부임 이후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 마냥 숨 가쁘게 이어졌을 그의 임인년 첫 행보들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국책연구본부장 취임 이후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실 듯합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지금 목에 걸고 있는 아이디카드가 요즘 제 일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 같습니다. 연구재단의 시계에 맞춰 하루를 보내다 보니 금세 시간이 지나가버리곤 합니다. 부임하고 나서 처음 일주일간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 되면 무언가 안도감이 드는 것도 교수 시절에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입니다. 그래도 무슨 일이든 처음이 가장 힘든 법이라 스스로 다독이며 두세 주를 지내다 보니 이제 안 보이던 공간과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익기 시작했습니다. 30여 년 전 한국연구재단 바로 건너편의 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일했던 경험도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데 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국책연구본부장 선임의 소회와 뜻하고 계신 바를 말씀해주세요.

30년 넘게 연구와 교육 현장 일선에서 연구재단, 특히 국가적인 과학기술 전망을 다루는 국책연구본부와 과제를 통해 많은 인연을 맺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제 제 전문 분야인 반도체와 나노를 넘어 국책연구본부가 다루고 있는 이공계 전반의 분야들을 모두 아울러야 하다 보니 새롭게 알아야 할 것이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과학기술 패권의 향배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에 국가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을 하게 됐다는 자부심과 보람이 더 큽니다. 첫 업무보고에서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국책연구본부가 되는 데 일조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미래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 과제 발굴과 성과 창출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소관 분야가 매우 방대해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실 듯합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국책연구본부는 신약·차세대바이오·뇌첨단의공학·나노반도체·소재부품·정보융합·에너지환경·우주·원자력·공공기술 등 10개 분야의 연구개발 지원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부터 광활한 우주까지 과학기술의 스펙트럼 전반을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연구재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그간 대학과 학계에서 맡았던 다양한 조직관리 경험이 국책연구본부의 현황을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조직도를 보며 대강의 맥락을 익히고 각 단장님과 실장님들의 도움을 받아 세부적인 사항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연구재단의 새로운 중점추진과제인 산·학·연·민·관 협업 플랫폼,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환경 조성 방안, 혁신적인 인재양성책 등의 파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98% 성공률과 10대 전략기술

지난해 말 열린 제20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는 향후 정부 연구개발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을 두 가지 사항이 중점 논의됐습니다. 하나는 ‘국가 R&D 성공률 98%’의 공과에 대한 성찰, 또 하나는 기술패권경쟁에 대비하는 ‘10대 국가 필수전략기술’의 선정입니다.

최근 국책연구본부가 특별히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안은 무엇입니까?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언급된 국가 연구개발 성공률 98%에 담긴 함의는 긍정보다 부정에 가깝습니다. 논문, 특허 등의 정량 평가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성과를 내기 쉬운 연구에 치중했던 풍토에 대한 자기반성이지요. 이제는 과거의 추격형 연구를 뒤로 하고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부와 연구재단, 산·학·연 전반에 걸쳐 무르익고 있습니다. 특히 기술패권 경쟁에서 지렛대가 될 원천기술 선도연구에 국가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연구재단과 국책연구본부 모두 성공·실패 개념의 전환과 질적 평가 강화 등을 통해 기존의 위험 회피형 연구풍토를 극복하고 도전적인 R&D 문화를 확산시킬 새로운 지원체계 마련에 역량을 총결집하고 있습니다.

10대 국가 필수전략기술은 어떤 분야들인가요?

국가안보와 경제안보, 신산업이라는 세 가지 요소들의 통합적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향후 10년간 주도권을 확보해나가야 할 분야들로 전통적으로 강점이 있던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를 포함해 ▲인공지능 ▲양자 ▲수소 ▲우주·항공 ▲5G·6G ▲첨단로봇 ▲첨단바이오 ▲사이버보안 등이 선별됐습니다. 모두 좀 더 잘해야 하는 게 아니라 앞서나가지 않으면 이제 국가 흥망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기술들입니다. 대부분 미국과 중국, 일본과 EU가 집중투자하고 있는 전략기술들과도 일치합니다.

3년여의 국책연구본부장 임기 동안의 목표를 소개해주세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우리나라의 R&D는 과거의 성공방정식으로는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때를 맞고 있습니다. 패스트팔로워에서 퍼스트무버로 국가 연구개발의 전략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 새로운 흐름의 첫 번째 퍼즐은 도전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지원이며, 그에 따른 마지막 조각은 자율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연구 문화의 정착입니다.
하지만 이런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개발 문화는 급조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알려진 길을 쫓을 때와 모르는 길을 가야할 때의 R&D 시스템은 지금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일인 만큼 제가 해야 할 몫은 새로운 연구개발 지원관리체계와 과제 발굴·기획의 씨앗을 심고 떡잎 정도까지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10년 뒤 제가 기여한 연구재단의 합리적 토대 위에서 탁월한 성과의 꽃이 피는 것을 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함께하는 리더십

앨버트 메라비언 UCLA 교수의 ‘메라비언 법칙’에 따르면 인간의 대화에서 메시지 전달과 신뢰감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내용이나 표정, 자세가 아니라 뜻밖에도 목소리(38%)라고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어법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인상적이던 유지범 국책연구본부장과의 인터뷰 녹취록을 풀며 사람의 목소리에 표현하기 힘든 설득의 에너지와 파장이 숨어 있다’는 메라비언 교수의 견해에 새삼 다시 공감하게 됩니다.

이공계 전반의 국책사업을 관장하는 국책연구본부에서 이제 다양한 현안과 이슈, 이해관계를 아우르시게 된 만큼 본부장님께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리더의 가장 큰 덕목은 역시 정확한 예측과 합리적인 목표 설정입니다. 그 다음 필요한 게 구성원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동기부여일 텐데요. 목표와 방향의 설정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재단의 많은 전문가들과 함께하는 것이니 크게 걱정이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갈 것인가란 리더십의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겠지만 제 성격 상 ‘함께하는 리더’가 되는 것이 가장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필요할 때는 언제든 당장의 감정에서 반 발자국 물러나 이성적으로 조율하는 게 다시 목표에 집중하고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가장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평소 갖고 계신 삶의 원칙이나 좌우명이 있으신지요?

사전질의지에서 이 문항을 받아 놓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웃음). 자녀들이 크면서 가훈을 물어볼 때 내가 뭐라 그랬지 다시 찬찬히 기억을 되돌려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거창하다가 점점 단순해졌던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의 가훈은 ‘정직하자’는 것이었는데요. 굳이 사자성어를 쓰거나 멋있어 보일 필요 없이 제가 지향하는 삶의 기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인 듯합니다.

끝으로 함께하는 재단 구성원과 연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개 임기 초반은 밀월 기간이라고 하지요. 앞으로 약 3개월간은 별다른 부딪힘과 갈등 없이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어질 텐데 이 기간이 앞으로 3년간의 협력 체계를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 그리고 연구지원과 관리는 본인의 흥미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도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소명 의식이 개인적으로는 즐겁게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큰 힘이 되기도 하는데요. 연구자와 재단 동료들, 그리고 저까지 모두가 열심히 또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합리적 토대를 조성하는 데 주력해 이 분위기가 매일매일 끝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About the Interviewee
유지범 국책연구본부장

서울대 금속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스탠포드에서 전자재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을 거쳐 1994년부터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부총장, LINC+ 사업단장, 공학교육혁신선도센터장, 나노기술연구협의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학술 연구와 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2018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에 선출됐다.

Asset of life

이콘

전임자가 쓰던 집기 대부분을 그대로 사용 중인 유지범 본부장의 간소한 집무실에서 거의 유일하다 싶은 변화는 책상 위 작은 성모자상 이콘의 등장입니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갑작스런 타지 생활에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아내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액자

역시 전임자가 남겨둔 액자인데 고스란히 유지범 본부장의 애장품이 되었습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으며,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에 변함없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는 시가의 뜻이 아름다워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10대 국가 필수전략기술. 이미지출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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